기사입력 2017-08-12 18:00:00
기사수정 2017-08-14 14:30:41
날마다 '회사 탈출' 꿈꾸는 직장인들 / 권위적 사내문화·동료와 갈등·줄야근 등 지친 2030세대 직장인들 퇴사가 ‘로망’ / ‘동병상련’ 사람들과 소모임 등 만들어 스트레스 풀며 위로·공감… ‘꿀팁’도 전수 / 승진·성과 압박에 짓눌린 4050도 고민… 부모·처자식 생각에 실천은 ‘언감생심’
#1. “네 남자친구한테 물어봐.” 국내의 한 외국계 호텔에서 근무하는 이가영(28·여·가명)씨는 얼마 전 영어로 작성된 회사 서류를 검토하던 중 상사인 A팀장에게서 이 같은 말을 들었다. 이씨의 미국인 남자친구에게 서류상 오류가 있는지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이씨는 “지금 미국이 새벽이라서 아마 자고 있을 것”이라며 에둘러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팀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화 독촉을 듣기만 하던 이씨가 퇴사를 결심한 상사의 결정적 한 마디. “야, 그냥 깨우면 되잖아!”
#2. 화장품 유통회사에서 일하는 김동혁(30·가명)씨에게 월요일 오전은 유난히 고달프다. 점심시간을 앞둔 오전 11시30분이면 늘 그를 호출하는 선임 때문이다. 선임은 그에게 근무 시작 시간인 오전 9시부터 지금까지 무슨 업무를 처리했는지 10분 단위로 보고하라고 했다. 한 일을 줄줄이 읊은 김씨를 살짝 올려보며 선임이 묻는 말. “5분이 남는데?”
권위적인 직장문화와 장시간의 노동, 부당한 업무지시, 동료와의 갈등…. 2030세대 직장인들이 ‘회사 탈출’을 꿈꾸는 주요 이유들이다. 직장생활은 한없이 고달프다. 그렇다고 어렵게 들어온 직장을 욱하는 마음으로 내팽개칠 수는 없는 일. 얄팍한 주머니 사정도 생각해야 하고 다시 구직을 하는 일도 쉽지 않다 보니 직장인들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나만 힘든 거 아니지?’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의 한 사무실. 직업도, 나이도 제각각인 직장인 8명이 모였다. 이날 처음 만난 사이인 이들은 ‘직장생활 중간점검’이라는 모임의 참가자들이다. 당장 사표 쓸 용기가 없어 퇴사를 망설이는 이들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 이직 노하우를 공유하고 싶은 이들도 있다.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이들처럼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소모임이 인기를 얻고 있다.
금융업계에서 근무하는 A(34·여)씨는 “회사 분위기 자체가 ‘워커홀릭’”이라며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있지만 사내에서 불만을 드러내기도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광고회사에 다녔던 B(37)씨는 “매일 야근을 하던 때에는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며 “환경이 바뀐 지금은 야근이 훨씬 줄었지만 친구들이 모두 야근 중이어서 저녁에 만날 사람도 없다”고 씁쓸해했다. 현재 근무강도가 상대적으로 덜한 회사에서 오랜 꿈이던 교육 관련 사업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인 B씨는 ‘언제 퇴사 결심을 했는지’, ‘사표 쓰고 두렵지는 않았는지’ 등 쏟아지는 질문에 “막상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또 다른 길이 열리더라”고 대답했다. 이어 “퇴직할 때 홧김에 나오지 말고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을 고려해 사직서를 제출하라”며 경험자만이 알 수 있는 ‘퇴사 팁’을 전수하기도 했다.
다른 직장인의 일상생활을 엿보며 위로를 받는 이들도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황민아(28·여)씨는 퇴근 후 습관처럼 유튜브에 ‘직장인’ 키워드를 검색한다. 다른 회사원들이 올린 ‘직장인의 하루’, ‘직장인이 퇴근 후 노는 법’ 등의 영상을 시청한다. 영상을 틀어놓고 다른 시청자가 올린 댓글까지 확인하고 나면 자정을 넘겨 잠들기 일쑤다. 직장인의 일상을 담은 이런 영상들은 시청자 수가 적게는 3만명에서 많게는 11만명을 웃도는 인기 콘텐츠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직장에서 중간 관리자급 이상의 지위에 오른 4050세대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어깨에 짊어진 것이 훨씬 많지만 퇴사란 말은 그대로 꿈일 뿐 힘겨운 직장생활을 인내로 버텨내기 마련이다.
11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공황장애로 병원을 방문한 환자(11만1109명) 가운데 40대가 3만194명(27.2%)으로 가장 많았다. 50대는 2만5861명(23.3%)으로 그 뒤를 이었다. 공황장애 환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40~50대들은 병원을 찾아 주로 승진과 자기계발, 성과에 대한 압박, 자식 문제 등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경기도의 한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박모(49)씨 역시 얼마 전 공황장애가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을 찾기 전 그는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열심히 일하면 된다’는 생각에 20년 동안 한 직장에서만 근무한 그였다. 물론 힘든 적도 있었다. 동료에게 밀려 승진이 늦어졌을 때나 자신이 맡은 일도 아닌 것에 대해 책임을 추궁당할 때, 후배들 앞에서 상사에게 면박당할 때 등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그럴 때면 대학 입시를 앞둔 장남과 자주 몸이 아픈 부모님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이런 그에게 미련없이 회사를 등지는 젊은 후배들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박씨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공부도 열심히 해 능력도 출중한 경우가 많다”면서도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서인지 성실함은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