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일상 톡톡] 중소기업 기술 빼내 배불린 대기업 '그간 행복하셨습니까?'

정부가 대기업이 협력업체 기술을 빼돌리는 행위를 집중 단속하기로 했습니다. 대기업이 협력업체 등에서 받은 기술자료를 유용(流用)한 사실이 입증되지 않아도 자료 유출 사실만으로 처벌받고, 원가명세 등 경영정보를 요구하는 행위도 앞으로는 금지됩니다. 기술을 빼앗아 유용한 대기업의 부당이득에 대해 물리는 징벌적 손해배상금도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최근 정부의 중소기업 기술보호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술 약탈이 근절되지 않는 것은 위법행위 적발이 신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소기업이 기술을 탈취 당해도 대기업의 '보복성 거래단절'이 무서워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함부로 신고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대기업의 기술 약탈은 중소기업의 건전한 성장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시간과 돈을 들여 개발한 기술을 대기업이 갈취해가거나, 납품단가에 정당한 대가를 반영해주지 않는다면 애써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피해업체가 직접 신고하지 않아도 정부가 직권조사에 나서기로 한 것이나,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강화한 것은 대기업의 기술 약탈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보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대책이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관행을 단절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도 합리적 계약에 기반해 상생하는 형태로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공정위가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유용 사건 전담조직을 신설하고, 내년부터 기계·자동차 분야를 집중적으로 모니터링한다.

기술자료의 유용 사실이 입증되지 않아도 유출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고, 수급사업자에 대한 원가 내역 등 경영정보 요구 행위가 금지된다.

더불어민주당과 공정위는 이달 8일 당정 협의를 열고 이같은 내용의 '대·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을 위한 기술 유용행위 근절 대책'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번 대책은 정부의 노력에도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자료 요구·유용이 줄어들지 않고 있어, 산업 경쟁력과 기술 개발 유인이 크게 낮아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공정거래 관련 법 가운데 하도급법에 최초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는 등 중소기업 보호 대책은 강하게 구축이 됐지만, 법 집행 조직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기술유용 행위 적발이 신고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보복성 거래 단절 등 우려로 신고가 적어 효과적인 대처에 한계가 있다는 문제도 있었다.

◆기술 갈취 당해도 '보복성 거래단절' 우려…속앓이했던 중소기업 수두룩

지금까지 기술 유용이나 부당 기술요구 등으로 공정위로부터 제재를 받은 사건은 각각 1건, 기술요구 서면 미교부도 3건에 불과했다.

당정은 전문적인 법 집행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올해 말 공정위에 기술유용 사건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기술심사자문위원회도 설치하기로 했다.

기술유용 사건 전담조직에는 변리사나 기술직 등 기술 전문 인력이 배치되며, 관련 직권사건뿐만 아니라 지방사무소에서 담당하고 있는 신고사건도 맡게 된다.

기술심사자문위원회는 전기·전자, 기계, 자동차, 화학, 소프트웨어 등 5개 분과별로 총 5명의 전문가로 구성된다. 정책을 수립하거나 사건을 처리할 때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공정위는 전담 조직을 신설한 뒤 내년부터 매년 집중 감시 업종을 선정하고 실태조사를 벌여 신고보다 한발 앞선 직권조사를 벌인다는 방침이다.

내년 첫번째 집중 감시 업종에는 직권조사 한시적 면제기업이 많아 규제 사각지대로 꼽혔던 기계•자동차 업종이 선정됐다.

공정위는 이들 업종을 상대로 서면 실태조사를 벌이고, 혐의가 발견되는 기업에 대해서는 직권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2019년에는 전기전자·화학, 2020년에는 소프트웨어가 공정위의 집중 감시를 받게 된다.

기술자료 요구 여부 등에 한정됐던 서면 실태조사는 △정당한 사유에 따른 요구 여부 △유용행위 발생 여부 △피해 규모 등을 추가해 이전보다 더 촘촘해진다.

◆적정한 기술 단가 보장…혁신·기술개발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 조성

직권조사 면제 대상이었던 공정거래 협약 우수기업에 대해서는 앞으로 기술자료 요구·유용에 한해 직권조사를 할 수 있도록 협약 기준이 변경된다.

올해 협약평가에서 우수기업으로 선정, 공정위의 직권조사를 면제받은 기업은 총 66개사다.

기술유용에 무관용 원칙을 적용, 앞으로 과징금 산정을 위한 관련 매출액 산정이 어려워도 정액 과징금을 부과하거나 고발 조치하는 등 제재 수위가 높아진다.

기존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최대 3배' 손해배상 기준을 '3배'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기술자료의 제3자 유출만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된다. 지금까지 대기업의 기술 유출 행위가 확인되더라도 유용 여부가 입증되지 않으면 처벌이 불가능했다.

수급사업자에 1∼2% 내외의 최소한의 영업이익을 강제하는 족쇄로 악용됐던 원가 내역 등 경영정보 요구 행위도 금지된다.

중소기업이 적정한 기술 단가를 보장받아 혁신과 기술개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준다는 취지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13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중소기업중앙회, 소상공인연합회, 중견기업연합회 등 중소사업자단체와의 간담회에서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장의 발언을 듣고 있다.
하상윤 기자
원사업자의 무임승차를 방지하기 위해 기술 개발에 참여하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공동 특허 요구 행위도 불법으로 규정된다.

목적물 납품 후 3년으로 되어 있는 조사 시효도 7년으로 확대, 기술유용으로부터 더 오랜 기간 보호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거래 전 협상 단계에서 벌어지는 기술유용을 제재할 수 있도록 위법성 판단의 기준을 완화하고, 기술자료의 비밀관리 요건 중 비밀 유지를 위한 상당한 노력은 '합리적 노력'으로 개선된다.

공정위는 "이번 대책으로 기술유용으로 인한 기대이익 보다 위법행위 제재에 따른 손해가 더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세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