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9-15 23:16:47
기사수정 2017-09-15 23:16:46
연인원 4210명·말 720필 동원 / 정조의 ‘인정정치’ 실현 장으로 / ‘세계문화유산’ 얼마든지 가능
‘정조대왕 능행차’를 재현하는 대규모 퍼레이드가 오는 23일과 24일, 1박2일에 걸쳐 열린다. 이 행렬은 서울 창덕궁에서 출발하여 수원 화성을 거쳐 화성시 사도세자의 융릉에 이르는 59.2㎞ 백오십리 길로, 연인원 4210명, 말 720필이 동원된다. 그간 수원시가 1996년부터 지역축제로 행해오던 것을 작년에 서울시가 동참하고 올해는 화성시까지 함께함으로써 전 구간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게 됐다.
정조대왕은 재위 25년간 해마다 아버지 사도세자 묘에 한번 이상 참배했다. 휘경동 배봉산에서 지금의 융릉 자리로 천장한 뒤 12년간엔 모두 13번이나 다녀왔다. 정조대왕의 능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795년 윤2월에 8일간 열린 것이었다. 이 해에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환갑을 맞이했고 사도세자 또한 부인과 동갑이었기 때문에 정조는 수원 화성에서 환갑잔치를 베풀었다. 이 행사 동원 인원은 예년의 5배인 6000명 규모였다고 한다.
이 행사의 전 과정을 기록한 것이 ‘원행 을묘 정리 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이다. 능행이라고 하지 않고 원행이라고 한 것은 당시 사도세자의 묘는 아직 능으로 승격되지 못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했기 때문이며, 을묘는 1795년을 말하고, 정리는 간행한 행정부서가 정리소(整理所)임을 밝힌 것이고, 의궤란 의례(행사)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이 의궤가 있음으로 해서 정조대왕 능행차는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 이 의궤에는 1.5㎞에 달하는 행렬이 세밀하게 그려 있으며, 당시 행사의 총 비용은 약 10만냥으로 그 출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행사 자체 비용은 6만냥이었고, 1만냥은 수원의 군사비, 1만냥은 제주도의 특별 구호비, 그리고 나머지 2만냥은 쌀로 바꾸어 8도에 각기 1000 내지 3000냥씩 분배해 흉년 때 빈민구제에 사용하게 하였다. 이 의궤에는 창경궁에서 출발할 때 빈민들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홍화문 사미도(賜米圖)’라는 그림도 실려 있다.
그리고 이때의 주요 행사를 기록화로 그린 것이 유명한 ‘능행도 8곡 병풍’이다. 8폭에는 인근 지역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치르는 광경, 노인들을 초대하여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 정조가 활쏘기를 하고 혜경궁과 함께 불꽃놀이를 즐기던 장면 등이 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노량진에 설치된 배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백성들이 나와 구경하는 것을 그린 ‘한강 주교 환어도(漢江舟橋 還御圖)’이다. 이번 행사 때는 의궤에 충실히 입각하여 실제로 한강에 배를 이용해 배다리를 설치하고 퍼레이드가 그 위를 건너간다고 한다.
이 ‘정조대왕 능행차’는 기본적으로 임금이 효(孝) 사상을 몸소 실현해 보인 것이고, 한편으로는 화성 천도를 염두에 둔 행사였지만 이에 못지않은 의의는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친민(親民)과 어진 정치를 실현하는 인정(仁政)의 정치철학을 실현하는 장으로 삼은 것이었다. 정조는 능행 도중 여러 형식으로 백성을 만났다. 때로는 행차 길에서 마주치는 백성들을 불러서 직접 묻고 적절한 조치를 내려주기도 하였고, 임금께 올리는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이라고 해서 꽹과리를 치면서 임금 앞에 호소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 했다. 이번 행사엔 이 격쟁도 재현된다.
세계 유명 역사도시에는 고유의 퍼레이드가 있다. 대개는 독립기념일, 전승기념일, 혹은 시민의 날에 행하곤 하는데 서울, 수원, 화성 3개시가 ‘정조대왕 능행차’라는 역사적 팩트에 입각해 퍼레이드 장을 열면서 이 날만은 너나없이 맘껏 거리를 활보하며 자신이 이 도시의 주인임을 만끽하게 하는 축제를 마련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행사가 시작되는 창덕궁, 행사가 벌어지는 수원화성, 그리고 행사가 끝나는 융릉 등 세 곳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들이고, 의궤 또한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그렇다면 3개 시장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조대왕 능행차를 앞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는 퍼레이드로 발전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 것은 근거 없는 희망이 아니다. 민관이 한 마음으로 동참하여 국민적 축제로 만들어 가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유홍준 미술사가·전 문화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