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훈의 만리경] 51년 태릉선수촌 시작과 끝…야구선수~공무원까지 촌장과 함께

태릉선수촌 전경.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른쪽 위 국제빙상장 우측에 강릉, 왼쪽 아래 주차장 왼편에 태릉이 자리하고 있다. 태릉과 강릉사이에 있는 태릉선수촌내 모든 시설은 오는 27일 진천으로 완전 이전한다. 사진=대한체육회 제공
 
[박태훈의 만리경] 야구선수부터 공무원까지…태릉선수촌 51년 역사와 역대 선수촌장

◇ 태릉선수촌 51년 3개월만에 문닫아

국가대표 선수의 요람으로 우리나라 체육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던 태릉선수촌이 이달말 문을 닫는다.

대한체육회는 오는 27일 진천선수촌을 공식 개촌, 태릉시대 마감을 선언할 예정이다.

진천선수촌 면적은 태릉선수촌의 5배인 150만4870㎡(약 45만평), 수용인원은 태릉의 3배인 35개 종목 1150여명이다. 숙소는 태릉의 3개 동 358실에서 8개 동 823실로, 훈련시설 역시 12개소에서 21개소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 태릉선수촌은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 232-4에 자리잡고 있다.

태릉선수촌 정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엔 강릉(문정왕후의 아들인 13대 명종과 인순왕후 릉), 왼쪽엔 태릉(11대 중중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릉)이 있다. 태릉이 좀더 가까워 선수촌 이름이 태릉으로 불리게 됐다. 

제22대 대한체육회장과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한 민관식 전 국회부의장은 태릉선수촌 건립을 주도하는 등 체육회 발전에 앞장선 인물이다.

▲ 성과, 효율 중심의 1960년대 작품

태릉선수촌은 민관식 제22대 대한체육회장(1964~1971년)이 창설을 주도했다.

1964년 1월 20일 체육회장에 취임한 민관식 회장은 그해 열린 도쿄올림픽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들자 효율적 훈련 필요성을 절감했다.

좋은 성적을 위해선 집중훈련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모든 대표선수들이 한 곳에 모여 체계적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민 회장은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선수들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곳, 가능하면 나라땅이 어딜까 궁리하던 중 1965년 어느날 화장실에서 문뜩 공릉동의 '태강릉'지역을 떠 올렸다.

즉시 현장을 답사한 민 회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 "나무 한그루 다치지 말라"는 다짐과 함께 허락을 얻어냈다.

1965년 11월 5일 문화재관리국 소유의 평수로는 약 3만평 (9만9000m² )에 3300여만원의 예산으로 선수촌 공사가 시작돼 1966년 6월 30일 개촌식을 갖게 됐다.

▲ 1966년 12월 31일 꿈의 실내체육관 등 시설 확충

태릉선수촌은 1966년 11월 26일에 부대시설 확충, 12월 31일 220평 규모의 실내체육관을 건립하여 전천후 훈련이 가능케 됐다.

이어 1970년 3월 23일 국제수영장 개장, 1971년 2월 20일 국제스케이트장 개장, 1972년 5월 20일 남자 숙소(전진관) 개관, 1975년 11월 17일 실내체육관(개선관) 개관, 1977년 1월 6일 식당(감래관) 준공, 1980년 12월 29일 스포츠과학연구소 설치 등으로 이어졌다.

이후 1984년 제2의 태릉선수촌이라는 진해선수촌, 1997년 12월 태백분촌 등이 들어섰다. 

태릉과 강릉의 유래를 설명한 안내문.

▲ 규모확장 필요성을 느끼던 때 태릉일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태릉선수촌도 시대흐름에 따라 확충과 보수의 필요성을 느꼈다.

또 태강릉 일대가 문화재 보호지역이라는 오랜 걸림돌도 갈수록 커져갔다.

이에 체육회는 2009년 2월 513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진천선수촌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또 2009년 6월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등재돼, 태강릉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 결과 태릉선수촌을 완전히 비우는 것으로 결론났다.

◇  태릉선수촌장…초대 권투선수 출신 이순재부터 사실상 첫 비경기인 출신인 23대 이재근 촌장까지 

1966년 6월 초대 태릉선수촌장은 해방후부터 체육회 살림을 꾸려온 야구선수 출신 이순재씨가 맡았다.

이후 지난해 연말까지 계속해서 경기인 출신이 선수촌장을 대물림해 왔다.

1985년 4월 김집 전 체육부 장관이 훈련원장이라는 이름으로 선수촌장에 올랐지만 사실상 선수촌은 훈련단장 김성집씨가 이끌었기에 '선수촌장=경기인 출신' 등식이 깨진 것은 아니었다.

이 공식에 종지부를 찍은 이가 현 23대 이재근 촌장이다. 이 촌장은 1976년부터 2009년까지 33년간 공직에 있었던 공무원 출신이다. 

1992바르셀로나 선수단장으로 임명된 김성집 선수촌장이 결단식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김성집 촌장은 역대 최장수 선수촌장이자 올림픽 한국 첫 메달리스트이다.

▲ 선수촌장의 대명사 김성집, 13년 7개월간 최장수 재임

김성집(1919년~2016년 2월 20일) 선수촌장은 한국 체육사에 지울 수 없는 이름이다.

우리나라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1948년 런던올림픽 역도 미들급)과 첫 올림픽 2연속 메달획득(1948, 1952년 헬싱키올림픽 역도 동메달)의 주인공이 김성집씨는 이후 죽을때까지 후진양성에 몰두했다.

960년 대한체육회 이사가 된 김 촌장은 1976년 11월 제9대 선수촌장에 올라 1985년 4월까지 8년 5개월 동안 재임했다.

10대 김집 훈련원장 시절에도 사실상의 선수촌장은 김성집이었다.  

김성집씨는 1989년 3월 11대, 1990년 4월 12대 등 1994년 5월까지 모두 13년 7개월간 선수촌장을 지냈다. 

1966년 세계레슬링 선수권을 통해 건국이래 첫 세계를 제패한 장창선 전 선수촌장.

▲ 장창선, 이에리사 등 세계1위 스타플레이어 출신 촌장

2000년 1월 취임한 15대 장창선 선수촌장은 1966년 세계레슬링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내 한국스포츠 사상 첫 세계를 제패한 스타로 유명했다.

2004년 3월 태릉선수촌장에 임명된 제17대 이에리사 선수촌장은 1973년 4월 9일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렸던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우승의 주역이다. 단체전서 한국이 세계정상을 밟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대대적인 귀국환영행사가 펼쳐졌고 학교 교과서에 사라예보 신화가 실리기까지 했다.  

제17대 이에리사 선수촌장은 1973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 여자단체전을 석권, 한국 스포츠 사상 첫 단체전 세계정상 정복이라는 기쁨을 선물한 스타 플레이어출신이다. 

이밖에 주요 선수촌장들을 보면 남자농구의 역사 김인건, 아시안게임 속사권총 3연패의 주인공 박종길, 한국 레슬링계 대부 이상균 등 하나같이 중량감 있는 경기인 출신으로 한국체육과 후배들의 선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한 인물들이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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