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10-09 23:26:54
기사수정 2017-10-09 23:26:54
업체, ‘수익 안된다’ 연재 중단 통보 / 세계 디지털 만화시장 성장에도 / 불공정 계약에 창작 의욕 무너져 / 작가 36% “부당 계약해지 경험” / 표준계약서 도입, 강제력 없어 한계 / 서울시, 문체부·업체와 업무 협약 / 법률자문 서비스 등 적극지원 나서
“권리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독자들에게 완결된 작품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웹툰작가 A씨는 현재 두 달 넘게 웹툰을 연재하지 못하고 있다. “진짜 제발 연재 중단되면 안 돼요”, “토요일마다 확인하고 가게 되네요” 등 연재를 요구하는 독자들의 댓글이 빗발치고 있지만 A씨는 작품을 더는 올리지 못하고 있다. A씨는 “3년을 두고 작품을 연재하기로 서로 합의했는데 업체에서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지난 7월 갑자기 연재 중단을 통보했다”며 “계약서상 기간은 1년이지만 이는 고료 지급 기준이지 연재를 1년 안에 마친다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간장 밥 먹으면서 7년 동안 어렵게 준비한 끝에 정식 작가로 데뷔했는데 업체의 갑작스러운 중단 요청에 대응하느라 재연재도, 다른 작품 구상도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2000년대 초반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에서 유통되던 웹툰이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 디지털 만화 시장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웹툰·만화 작가들은 불공정 계약 때문에 창작환경을 위협받고 있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은 웹툰을 포함한 세계 디지털 만화 시장 규모가 2011년 3억1300만달러(약 3800억원)에서 2020년 11억7700만달러(약 1조3300억원)로 3.8배나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네이버와 카카오 등 국내 웹툰 플랫폼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덩달아 국내 작가의 작품이 해외에 다수 소개되는 상황이지만 웹툰작가들의 권리는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불공정 계약 응답 작가 10명 중 4명 부당 계약해지
9일 서울시가 올해 초 벌인 문화예술 불공정 계약 경험 실태조사와 지난 8월까지 서울시 문화예술불공정상담센터에 접수된 피해사례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웹툰·만화 작가 315명 중 36.0%(117명)가 부당한 계약해지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2차 저작권을 모두 업체에 넘기는 ‘매절계약’ 등의 불공정한 계약조건을 강요당했다고 응답한 비율도 36.3%(118명)에 이르렀다. 한 작가는 매절계약 때문에 업체에서 자신의 작품으로 1억원이 넘는 2차 저작물 수익을 올리는 동안 월 100만원의 고료밖에 받지 못해 불공정피해상담센터를 찾았다. 서울시 실태조사 작업에 참여했던 강신하 변호사는 “젊은 작가를 착취하는 거래구조가 예술인의 창작의욕을 떨어뜨리고 다양하고 질 높은 문화콘텐츠 창작을 방해해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깎아 먹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해 6월 예술인복지법이 개정되면서 서면계약 체결이 의무화하고 웹툰·만화업계에서 자체 제작한 ‘표준계약서’가 도입됐지만 불공정 관행 문제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표준계약서 제작에 참여한 제효원 웹툰작가협회 사무국장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주해서 협회에서 표준계약서를 제작했는데 일부 업체 측에서는 자신들의 권리가 대폭 축소됐다며 자체 계약서를 사용하고 있다”며 “표준계약서가 하나의 가이드가 될 수 있지만 사용을 강제할 수 없고 각 웹툰 플랫폼마다 수익구조가 달라 전체 시장을 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웹툰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생겨난 신생 웹툰 플랫폼이 업계의 공정 관행을 해친다는 주장도 있다. 네이버에서 웹툰을 연재하는 권혁주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콘텐츠학과 교수는 “네이버와 카카오 등 대형 포털과 계약을 맺었다가 불공정 계약으로 손해를 입었다고 신고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며 “오히려 이들 업체가 해외로 진출하면서 국내 작가의 작품도 해외 시장에 소개하고 웹툰의 영화화·드라마화 등도 지원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웹툰 시장이 커지면서 업계에 뛰어든 신생 웹툰 플랫폼이 수익성을 내세워 지각비 같은 불합리한 조건을 강요하거나 갑작스러운 연재 중단을 요청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웹툰작가는 “대기업의 투자를 받았다는 한 웹툰 플랫폼에서 최근 자신을 포함해 10여명의 작가에게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연재 중단을 요청했다”며 “안정적인 연재 보장과 해외진출까지 돕겠다는 약속은 거짓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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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콘텐츠코리아랩 대학로분원 카카오 상생센터에서 열린 ‘공정한 웹툰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식’에서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 웹툰 업체 관계자들이 협약 서명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서승진 KT 케이툰 총괄책임(왼쪽부터), 박대우 서울시 경제기획관, 조현래 문체부 콘텐츠정책국장,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 박정서 포도트리 다음웹툰컴퍼니 대표. 서울시 제공 |
◆불공정상담센터·웹툰작가협회, 법률 자문 서비스 제공
웹툰·만화 작가의 권리를 지키고 업계에 공정계약 관행을 뿌리내리기 위해 서울시는 지난달 문체부와 주요 웹툰 플랫폼 3개사(네이버 웹툰·포도트리·KT)와 ‘공정한 웹툰 산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민관이 함께 웹툰 계약 현장에서 발생하는 불공정 사례를 공유하고 이를 막을 웹툰 관련 표준계약서를 마련해 활용하기로 했다.
웹툰작가협회와 서울시 문화예술불공정상담센터는 계약서 검토와 연재 중 발생하는 계약 관련 문제에 법률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2월 말 문을 연 불공정상담센터는 문화예술 불공정거래 분야의 전문 변호사 9명이 돌아가면서 월요일마다 마포구 홍대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무료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한다. 개소 반년 만에 웹툰·만화 작가뿐 아니라 작곡가, 연주자 등 30여명의 다양한 문화예술인에게 부당한 권리 침해에 법적 대응 방법을 안내했다. 웹툰작가협회에서도 계약서 사전 자문 서비스를 제공해 신인 작가들이 웹툰 플랫폼과 공정한 계약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권 교수는 “업계에 공정한 관행이 뿌리내리려면 작가들이 현재 어느 수준의 대우를 받는지를 확인하는 실태조사가 필요하다”며 “웹툰·만화 작가를 도구가 아니라 좋은 작품을 만들도록 환경을 만들고 그 속에서 나오는 좋은 작품으로 업계가 성장해야 하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서동록 서울시 경제진흥본부장은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불공정 관행을 개선하고 상생협력하는 경제민주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관계 법령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