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봉황동 유적지 '유력자 거주지' 등 현장 공개

가야시대 건물지·토기 수백 점 출토…"가야사 복원 청신호"
 22일 오후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에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가야시대 생활 터 발굴조사 성과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22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황동 봉황대 구릉 북동쪽 평탄지 일대가 모처럼 시끌벅적했다.

이곳은 옛 금관가야 왕궁 추정지인 김해 봉황동 유적지(사적 제2호)다.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이날 4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가야시대 건물터 10여 곳과 토기 수백 점을 일반에 공개했다.

가야시대 건물지(터)는 지표면에서 4.5m 아래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큰 건물터는 긴축이 15m, 짧은 축은 12m로 둥글게 벽을 두르고 내부에는 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가야문화재연구소 측은 "이 건물터는 상당한 유력자가 생활했던 공간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특정 시대 문화 양상을 보여주는 지층을 '문화층'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곳에서는 다양한 토기들이 쏟아졌다.

가장 눈길을 끄는 토기는 가야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꼽히는 기마인물형토기에 달린 뿔 모양 잔과 흡사한 각배(角杯)였다.

각배는 일부만 드러났지만, 모양과 형태는 뿔잔과 거의 일치했다.

가야시대 의례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긴 원통을 세운 그릇받침인 통형기대. 연합뉴스
22일 오후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에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금관가야 왕궁 추정지에서 나온 유물을 학계 관계자들이 직접 만져보고 있다. 연합뉴스
유적지에서는 가야시대 의례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긴 원통을 세운 그릇받침인 통형기대(筒形器臺), 화로형 토기 등도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 공개에 참석한 학계와 인근 주민들도 가야시대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터와 유물이 다량 쏟아져 나온 것을 보고 감탄했다.

김삼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은 "금관가야 성격과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문화층이 확인된 것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김 소장은 "일반 서민이 아닌 유력자 거주지 터가 나온 점과 가야시대 생활상을 확인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물이 나온 점은 큰 발굴 성과"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현장에 참석한 허성곤 김해시장은 "정부가 가야사 복원을 위한 조사·연구를 국정과제로 선정한 때 햇빛을 본 왕궁터로 보이는 가야 유적지 발굴은 정말 흥분된다"고 말했다.

허 시장은 "앞으로 연차적으로 토지를 매입해 발굴을 확대함으로써 금관가야 왕도 김해를 후세에 알리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전기 가야 맹주국인 금관가야(A.D42∼532년)의 왕궁 및 도성 내부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