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의음식문화여행]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행복해질 것이란 말은 삶이 비루하고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삶에 환멸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연말이 되면 왠지 일 년 동안의 수고로움에 대한 어떤 위안을 찾고 싶다. 눈이라도 내리면 어떤 위안이라도 받게 되지 않을까 싶다. 눈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내리니까. 모든 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니까.

해서 성냥팔이 소녀는 몇 번이나 성냥을 긋는다. 그것이 짧게 끝나는 환상이라 할지라도. 눈 오는 긴 겨울밤, 흰 눈빛에 반사되어 환하게 켜지는 불빛 속에서 짧은 행복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흰빛은 어떤 환각을 제공한다. 마법적인 탈세속의 느낌을 전해준다. 눈송이가 배고픈 성냥팔이 소녀에게는 문득 먹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을까.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는 흰 눈송이 같은 팝콘이 하늘 위에서 머리 위로 떨어지는 진풍경이 있다. 때는 6·25전쟁이 한창인 1950년 늦가을. 이념도 전쟁도 모르고 살아가는 강원도 두메산골. 연합군 미군 하나, 인민군 셋, 국군 둘이 동막골에서 우연히 조우한다. 남과 북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대치한다. 이 지독한 이념의 충돌 속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은 마을사람들이 겨울철 식량으로 모아놓은 옥수수 창고로 떨어진다. 옥수수가 하늘로 치솟으며 새하얀 눈처럼 팝콘이 내린다. 그러자 모든 것은 게임오버. 지금까지 그들 사이의 증오나 분노, 이념과 전쟁기억이 사라진다. 눈송이처럼 내리는 팝콘이 마치 그들에게 세례라도 베풀었다는 듯이. 그들은 세상의 모든 현실이념과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간다.

팝콘은 원래 미국식 요리법으로 탄생한 음식이다. 영화관 앞에서 진한 버터향을 진동시키지만 팝콘은 가볍고 유쾌한 간식거리다. 영화를 보다가 잠깐 웃기라도 한다면, 잠깐 실수로 몸이 흔들거리기만 한다면, 커다란 팝콘 한 통이 다 쏟아지곤 한다. 그러나 허공 중에 몸을 하얗게 날리는 것이 팝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며칠 전 팝콘 같은 첫눈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첫눈을 보며 모두 휴대전화로 사랑의 인사를 쏘아댔다. 흰 눈이 주는 위안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일까. 눈이 내리면 모두 배고픔을 잊고 행복해진다. 세상의 모든 절망이, 분노가 가라앉는 것 같다. 눈은 세상의 어느 구석에도, 굴곡이 진 곳에도 똑같이 내리니까. 세상 모두를 평화롭게 해주니까. 남과 북, 미국과 중국의 첨예한 정치적 대립갈등도, 적대감도 사라질 수 있으리라.

‘펑’ 하고 팝콘기계에서 팝콘이 튀어 오른다. 허공 중에 팝콘이 눈처럼 날아오른다. 크리스마스엔 누군가와 팔짱을 끼고 걷고 싶다. 함께 눈 같은 팝콘을 먹으며 유년의 평화로 돌아가고 싶다. 몸의 모든 감각기관이 뻗어가 세상의 모든 이들과 화평할 수 있을 것 같은 크리스마스 밤이 그리워진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