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계획된 게 아니라 변이의 산물이다”

中 사회학자 정예푸 ‘문명은 부산물이다’ 발간 / ‘특별한 목적으로 탄생’ 통념에 반기 / 농업·문자·종이 등 6가지 요소 분석 / “농경생활, 수렵·채집보다 더 불편 / 식량부족 사태 유발·계급사회 불러 / 한국에서 유독 조판인쇄 발달한 건 / 나무 부족하고 인쇄량 적었기 때문”

다윈 진화론의 핵심은 ‘적응’과 ‘자연선택’이다. 다윈은 “유익한 변이는 남고 유해한 변이는 도태된다. 나는 이것을 자연선택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자연환경이 환경에 적응한 형질을 남기고, 적응하지 못한 형질을 도태시킨다는 것이다.

인류는 발전의 역사 속에서 다른 동물이 갖지 않은 의식과 이성을 발달시켰다. 의식과 이성은 인간의 신체 부위처럼 인류의 생존수단이 됐다. 문명이 장족의 발전을 거둔 덕에 인류는 자연선택이라는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사회학자인 정예푸(鄭也夫·사진)는 인류의 문명이 특별한 목적이나 의도에서 탄생됐다는 통념에 반기를 든다. 그는 신간 ‘문명은 부산물이다’에서 “문명은 계획할 수 없으며 인류의 목적적 행위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문명의 여러 요소 중에서도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족외혼제, 농업, 문자, 제지, 조판인쇄, 활자인쇄 등 6가지를 분석한다. 초기 인류는 채집과 사냥, 농업을 통해 생존했다. 이후 본격적인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정착 생활을 하며 땅을 일구고 식량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자는 농경생활이 수렵이나 채집보다 더 편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파종과 수확 사이의 기간에는 식량부족으로 생존 자체가 위험했다”면서 “농경은 인류의 이성적인 선택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농경사회가 인구 증가와 노동 분업 등으로 이어져 계급사회를 도래시켰다고 말한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구텐베르크 광장에 있는 구텐베르크 조각상.
흐름출판 제공
조판인쇄는 문자와 종이에 이어 인류가 만든 위대한 발명품이다. 조판인쇄의 시조는 도장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장이 시작된 이래 6000여년간 진흙 위에 찍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도장과 종이가 만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저자는 종이가 등장하고 500여년이 흐른 후에야 도장과 종이가 결합됐고, 조판인쇄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한국에서 유독 조판인쇄가 발달한 이유에 대해 목판으로 사용할 나무가 부족했고, 인쇄량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특정한 기술이나 제도가 의도하지 않은 변이의 결과라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켜 온 것은 대개 부산물이었다. 부산물이 나오기 전의 행위에 목적이 없지는 않지만, 그 목적은 다른 기물을 만들었고 그 기물이 향후 새로운 인자와 수요의 촉진 아래 기능이 변이하면서 다른 거대한 효용을 낳았다. 이 변이가 집중되어 마침내 최후의 위대한 발명이 탄생했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중국사회와 역사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길러왔고, 중화사상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그는 책에서 문명의 기원을 논할 때도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는 추천사에서 “정예푸의 관점은 한마디로 문명 자체의 화려함이나 위대함에 매몰되지 말고 인간 자신의 모습을 냉철하게 바라보자는 것”이라며 “물질문화는 각 시대의 생존 과정에서 나온 것일 뿐, 결국 문명의 주인공은 인간”이라고 적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