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12-23 21:45:00
기사수정 2017-12-23 21:34:38
차별 조장하는 ‘미혼모’ 호칭, 대안은 없나
“비혼이건, 경제적 취약층이건, 모든 부모에게 출산이 기쁨이 되고, 아이에게 축복이 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지난달 26일 조국 민정수석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요청에 답하며 이같이 말했다. 조 수석은 “낙태죄 논란은 대립을 넘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단계”라며 교제한 남성과 이별한 후나 이혼 소송 상태에서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경우 등을 예로 들었다. 이 과정에서 조 수석은 자녀가 있지만 결혼 상태가 아닌 여성을 의미하는 미혼모를 대신해 ‘비혼모’라는 용어를 사용해 여성 스스로 주체적으로 출산을 선택했다는 의미를 담았다.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최근 이에 맞춰 차별과 부정적 이미지를 담고 있는 미혼모라는 호칭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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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6일 낙태죄 폐지 청원에 답변하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사진=청와대 페이스북 |
◆‘정상가족’ 강요하는 사회 인식이 ‘미혼모’ 만들어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서울시인권위원회·서울시성평등위원회는 지난 6일 ‘미혼모 호칭, 정체성 확인과 차별적 효과 사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성정현 협성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미혼모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를 낳은 여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혼인이라는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미완’ 혹은 ‘불충분’의 존재로 정의되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 교수는 미혼모라는 용어 자체가 남성과의 결혼 관계에서 자녀를 낳은 다른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에 대한 ‘구별 짓기’에 해당한다고 봤다. 여전히 결혼한 관계 내에서의 출산만을 ‘정상적인’ 가족 형성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인식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성 교수는 결혼과 출산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된 시대에 미혼모라는 용어는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 혼인과 출산은 더는 관습과 제도가 아닌 당사자의 주체적 선택과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한 결혼정보회사가 전국 25∼29세 이상 미혼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혼인에 대한 인식 조사를 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46.9%가 ‘10년 후에는 사실혼(동거)이 보편적일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와 함께 성 교수는 미혼모 대신 ‘비혼모’나 ‘언웨드(unwed)’ 등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있다고 덧붙였다.
◆미혼모 차별, 호칭 바뀌면 문제 해결될까
전문가와 대다수 미혼모는 미혼모라는 용어에 사회가 이들을 ‘문제적 집단’ 치부하는 부정적 면이 있다는 데 이견이 없다. 미혼모라는 용어가 미혼모와 그 자녀의 인권, 평등을 제한하고, 자녀를 함께 만든 남자의 존재는 드러내지 않는 등 양육과 출산에 대한 비난과 책임을 모두 여성에게 지우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는 “‘낙태’, ‘미혼모’라는 용어는 여성만을 가시화해 남성의 책임을 은폐하는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낸 지배의 언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단순히 용어를 바꾸는 게 사회적·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미혼모에 대한 근본 대책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온다.
박영미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아무리 좋은 이름으로 바꿔도 인식 변화와 정책 지원이 없으면 소용없다”며 “미혼모를 대체하는 용어로 종종 쓰이는 비혼모도 ‘기혼모’와 구분되는 차별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밝혔다.
자신을 아홉살 남자 아이 둔 미혼모라고 밝힌 이슬비(38)씨는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성까지 미혼모로 볼 수 있는 지 개개인의 생각이 다른만큼 미혼모라는 용어를 바꾸기 위해서는 현재 양육 중인 아이와 현재 상태, 미혼모가 되기까지의 각 과정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씨는 “호칭이 변한다고 오랜시간 갖고 있던 편견이나 용어의 의미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면서도 “우리 주변엔 주체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헤쳐나가고 있는 의식있는 미혼모들이 많고, 오히려 고충을 해결할 방법은 정부와 단체와의 연대, 당사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책이다”고 강조했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