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01-04 20:55:31
기사수정 2018-01-04 20:55:28
서영채, 비평집 ‘죄의식과 부끄러움’ 펴내 / 100년간 죄의식과 부끄러움으로 점철 / 지난해 촛불집회 국면이 전환점에 달해 / 이광수 이어 최인훈도 죄의식 짊어져 / 이청준은 죄의식보다 부끄러움에 무게 / 신경숙, 민주화시대 여성의 원한도 부각 / 김경욱·한강, 자유로워지고 새 모델 제시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이광수의 ‘무정’으로부터 100년이 흐르는 동안 소설이라는 거울에 비친 한국인의 마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비평가 서영채(57·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는 그것을 ‘죄의식과 부끄러움’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압축한다. 이광수에서 시작해 최인훈 이청준 임철우 신경숙 김경욱 한강 등의 작품을 분석해 나가면서 그 모습이 어떻게 반영됐는지 깊이 들여다본다. 이 렌즈로 6년에 걸쳐 발표한 글들을 ‘죄의식과 부끄러움’(나무나무 출판사)에 4부 10장에 걸쳐 담아냈다.
“마음의 차원에서 볼 때 식민지 근대성의 무엇보다 큰 특징은, 자아 이상 혹은 자기 발전의 모델이 외부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끝없이 원본과 복사본의 차이를 점검하려 하고, 외부와 타자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현실적 주권을 자기 손에 쥐고 있음에도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노예화한다. 주체가 자기 주권을 외면하고 있는 상태야말로 식민지 근대성의 마지막 모습이겠거니와, 그 선을 넘어서면 자기 외부에 어떤 모델도 상정하지 않은 채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기 길을 찾아가야 하는 단계에 도달한다.”
서영채는 “그 마지막 선을 우리는 2017년에 넘어선 것이 아닌가 한다”면서 죄의식과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지난 100년 한국인의 마음이 지난해 ‘촛불집회’ 국면에 이르러 전환점에 이르렀다고 서문에 밝혔다. 왜 그러한가. 근대문학 연구자인 그가 일본 소설을 접했을 때 나쓰메 소세키 같은 일본 소설의 아버지는 지나칠 만큼,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피칠갑을 할 정도’로 넘치는 죄의식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양상은 한국 소설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광수는 어렸던 자신에게 ‘국권 상실’의 책임이 없음에도 과잉윤리의 죄의식을 짊어졌다. 서영채는 주체란 무엇보다도 자기 생각과 행동에 책임을 짐으로써 생겨나는 것인데, 그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없는 죄까지 끌어당겨야 비로소 책임의 자리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광수를 지나 최인훈에 이르러도 그 죄의식, 과잉윤리의 양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최인훈이 만들어낸 ‘광장’의 인물 이명준은 남도 북도 거부한 채 중립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이데올로기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바다에 투신한다. 혹자는 그것이 사랑 때문이었다고 분석하지만 서영채는 어림없는 논리라고 일축한다. 그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주체의 자리에 서기 위한, 이광수보다는 조금 더 냉철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본질은 같은 자발적인 죄의식의 마음자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4·19세대로 명명되는 이청준에 이르면 죄의식보다도 ‘부끄러움’의 자리가 더 크게 보인다는 시각이다. 근대의 교과서로 상정한 나라나 제도와 비견하면 늘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자의식, ‘원본’과 비교하려는 ‘복사본’의 자세가 부끄러움을 배태시킨 것이다. 이청준의 부끄러움은 산업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파생됐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도 메이지유신을 시작할 무렵 서양의 원본과 비교하는 부끄러움이 유독 강하게 발현됐듯 한국도 그러하다는 게 서영채의 시각이다. 가난에 복수하기 위해 문학을 선택했다는 이청준이야말로 그 부끄러움을 보여준 전형적인 모델인 셈이다.
서영채는 광주항쟁에서 살아남은 죄의식과 부끄러움이야말로, 양 감정이 분리되지 않은 진짜 감정이라는 차원에서 비로소 임철우에 이르러 죄의식과 부끄러움이 일체가 되는 경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고 본다. 임철우는 전남대 재학 중 광주항쟁을 맞았고, 살아남았다는 부채의식을 소설로 갚아온 대표적인 작가다. 임철우 세대를 넘어서서 신경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거론되는 ‘외딴 방’에 이르면 죄의식이나 부끄러움을 넘어선 ‘원한’이 보인다고 진단한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강간당하고도 짓눌렸던 영채라는 여성의 원한이 남성들의 죄의식과 부끄러움이라는 그들의 세계관 아래 왜곡되고 감춰져 왔다면, 문민정권이 들어서면서 다분히 남성적인 욕망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국면에서 이제 여성들의 ‘원한’이 꿈틀거리며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외딴 방’은 성공서사처럼 보이지만, 주인공이 왜 성공했음에도 안타까움을 지니는지는 정작 작가 자신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서영채는 분석한다.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외피로 작금 분출되는 ‘원한’이라는 이름의, ‘무정’에서부터 이어지는 그 뿌리 깊은 정황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 ‘원한’은 그가 향후 천착할 새로운 좌표이기도 하다.
서영채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에서도 자유로워지고, 더 이상 원본과 비교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는 세대가 김경욱, 한강 등으로 상징되는 작가군이라고 본다. 그는 “촛불집회는 상징적 주권자인 국민과 현실 속의 그 대표자, 그리고 진짜 정치적 주체인 시민이 합일되는 장면을 보여준 매우 특별한 사건”이라면서 “평화롭고 아름답게 절차를 지켜가면서, 최고 권력자를 파면하여 감옥에 보낸 2017년의 사건에 대해서는, 마땅히 밖에서 따올 이름도 모델도 없는, 한국 고유의 촛불집회일 뿐”이라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