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해외 가상화폐 카드결제 차단 요청해놓고… 정부는 '모르쇠'

투자자들 여론 악화 우려한 듯 / “공문·가이드라인 못준다” 변심 / 국제카드사 협조요청 명분없어 / 해외 거래소 실체 파악 어려워 / 민간차원 결제 차단 한계 봉착 / 정부 “거래소 폐쇄 살아있는 옵션”
정부가 국내 카드사에 해외 가상화폐 거래소 결제 차단을 요청해 놓고도 이를 위한 공문 제공을 거부하는 이율배반 행태를 보이고 있다. 가상화폐 대책과 관련한 정부의 오락가락 행보가 시장의 혼선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지난 10일 서울 중구 여신금융협회에서 국내 카드사 관계자들을 소집해 해외 가상화폐 거래소 결제 차단을 권고했다. 이에 카드사들은 비자·마스터카드 등에 협조 요청을 해야 하는 만큼 결제 차단의 명분을 삼을 수 있는 공문을 요청했고 기재부는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지난 11일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방침을 언급한 이후 기재부가 돌연 입장을 바꿨다는 게 금융권 설명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15일 2차 회의를 앞두고 기재부가 공문과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해 왔다”며 “구두로는 여전히 결제 차단이 필요하다고 권고해 카드사들이 자율적으로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16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상기 법무장관과 김부겸 행자부장관이 이야기를 나누며 입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결국 15일 여신금융협회 사무실에서 열린 2차 회의는 1차 때와 달리 주관기관이 기재부에서 여신금융협회로 변경됐고, 기재부 관계자도 참석하지 않았다. 금융권에서는 해외 거래소 결제 차단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게 아니냐는 불만이 나온다. 한 카드사는 최근 콜센터 등을 통해 카드를 해지하겠다는 항의전화를 70∼80건 받았고 일부는 해지로 이어졌다. A금융사 관계자는 “해외 거래소 결제 차단으로 민원 등 문제가 발생할 때 공문이 없으면 카드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 가맹점은 국내 카드사가 비자·마스터카드 등 국제 카드사와 계약을 맺고 수수료를 주고 이용하는 구조다. 국내 카드사가 국제 카드사로부터 해외 가맹점 정보를 받을 때 가맹점 번호를 받는데 이 번호만으로 가맹점의 실체를 알 수 없다. B금융사 관계자는 “해외 가맹점 번호를 받아 카드사 간 이를 공유하고 결제를 차단해야 하는데 민간 차원에서는 한계가 있다”며 “해외 가상화폐 거래소 규모도 파악이 힘들고 그 숫자도 계속 늘고 있어 어려움이 더 크다”고 말했다.

가상화폐 규제에 나선 정부는 카드사의 해외 가상화폐 거래소 결제 차단을 추진하고 있지만 페이팔 등 해외 온라인 전자 결제시스템을 통한 우회 결제 차단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현재 해외 온라인 전자 결제시스템에 접속해 본인 소유 카드를 등록할 경우 이를 통해 가상화폐를 구매할 수 있다. 이를 막으려면 페이팔 등 해외 전자결제업체의 협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페이팔이 가상화폐 결제 차단에 협조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해외업체가 국내 민간 금융사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서비스를 이용해 가상화폐를 구매하는 것을 차단해 줄지 의문”이라며 “해외 거래소 결제 차단이 큰 실효성을 가질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경제학과)는 “해외 거래소에서 가상화폐를 구매하는 행위는 자칫 금융실명제법, 외환관리법 위반 소지가 있는 만큼 협회 차원에서 할 일이 아니다”며 “정부가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민간 금융사에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날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도 살아 있는 옵션이냐는 질문에 “살아 있는 옵션인데 부처 간 진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가상화폐에 대해서는 비이성적 투기가 많이 되는데 어떤 형태로든 합리적 규제가 필요하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염유섭 기자 yuseob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