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01-22 00:05:19
기사수정 2018-01-22 00:05:18
대한민국 암호화폐 광풍에 시끌
정부는 조급증과 불통으로 대응
국민은 천정부지 집값에 더 좌절
섣부른 결론 대신 순기능 살펴야
금융감독원 직원 A씨는 참담하다. 온몸에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암호화폐(가상화폐, 정부는 가상통화로 명명)로 돈을 번 게 화근이다. A씨가 암호화폐를 산 건 작년 7월 초. 정부 규제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5개월간 보유했다가 12월11일 팔았다. 수익률 50%, 700만원을 벌었다고 한다. 이틀 뒤 미성년자·외국인의 거래를 금지하는 ‘가상통화 정부대응방안’이 발표됐다. A씨는 규제안을 총괄한 국무조정실에 파견 근무 중이었다. 이런 사실로, A씨는 과녁이 되었고 집중포화를 맞았다.
A씨는 비난받아 마땅한가. 대중은 ‘금감원 직원이 정부 규제 발표를 앞두고 가상화폐를 매도해 시세차익을 챙겼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공무상 취득한 정보를 이용해 사익을 챙긴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하다. 그러나 A씨의 수익은 정부대책과 관계 없다. 규제안 발표 이후 암호화폐 가격은 더욱 뛰었다. 일례로 50만원대이던 이더리움은 이후 4배 이상 올랐다. 연초까지 보유한 뒤 팔았더라면 A씨의 매매차익은 수천만원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매도 시점이 하필 그때인 건 우연이 아닐 수 있다. A씨는 “당시 휴가 중이었고 이틀 뒤 대책이 발표된다는 걸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지만 그게 거짓이라면 얼마를 벌었든, 잃었든 비난받을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A씨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A씨의 혐의 이상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암호화폐 전쟁 중이다. 정치권, 학계, 세대간에, 심지어 친구들의 술자리에도 전선이 펼쳐진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정부와 시장 사이의 전선이다. 암호화폐를 ‘돌덩이’ 취급하는 정부, ‘쇄국정책’이라며 맞서는 시장의 충돌은 이 전쟁의 핵심이다.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6월 선거 때 두고 보자. 가상화폐 폐쇄 운운하는 넘들아. 곡소리 날 것이다.”…. 인터넷 댓글들은 이 전쟁이 이념적·정치적 이슈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A씨는 이 전쟁의 포로다. A씨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A씨만의 것이 아니다. 정부를 향한 시장의 불신과 분노가 과녁으로 떠오른 A씨에게 집중적으로 퍼부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 시장은 이제 A씨의 멱살을 잡고 정부를 윽박지른다. 청와대엔 정부 관련자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특검 발의 등을 요구하는 청원이 잇따른다.
작금 암호화폐 시장이 투기판, 도박판인 것은 사실이다. 블록체인이 뭔지,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가 뭔지 제대로 이해하고 투자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보단 투기 광풍에 올라타 한방을 노리는 심리가 시장을 격동시킨다. 이런 판국에 정부가 불붙은 시장에 기름을 끼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정부 대응이 옳고 정당한 것은 아니다. 거기엔 투기부터 잡고 보자는 조급증, 전문가들의 직설엔 귀를 닫는 불통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섣불리 거래소 폐쇄 카드를 꺼내든 것은 일례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주식시장도, 강남 아파트시장도 투기판인 것은 마찬가지다. “암호화폐 투자 손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집값이나 잡아라!” 한 네티즌의 호통이 암시하듯 젊은 세대에겐 암호화폐 투자 손실보다 천정부지 집값이 안기는 좌절감이 훨씬 더 클지 모른다.
암호화폐를 돌덩이로 취급하는 정부의 태도도 조급증과 불통의 산물일 수 있다. 암호화폐가 법정화폐의 보완재로 현실 세계에서 작동한 사례는 이미 역사다. 파산한 그리스에서 경제 맥박을 다시 뛰게 한 것이 바로 암호화폐였다. 2015년 그리스에서 유로화와 가치가 연동된 암호화폐(trade point)는 비용절감을 넘어 고용창출의 마술도 부렸다. 소득이 없는 가장이 암호화폐 덕분에 전기공을 불러 태양열 발전기를 고칠 수 있었다. 2015년 9월 뉴욕타임스의 보도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암호화폐 기반의 체크카드(debit card)도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블록체인을 ‘전지구적 신뢰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암호화폐는 그 신뢰시스템 위에서 만들어진다. 정부 주장처럼 둘을 분리할 수 있을까. 아직은 미지의 세계, 섣부른 결론은 위험천만하다. 오만은 오판을 낳는다.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실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그 상상의 힘으로 4차산업혁명이 인류의 삶을 바꾸는 중이다.
류순열 경제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