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값 한번 알아봤는데, 정말 한숨만 나오더라구요….”
서울에 사는 4년차 직장인 김모(31)씨는 최근 직장에서 하루종일 몰래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다. 슬슬 ‘감’을 잡기 위해서였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결혼 소식에 자연스레 결혼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집이었다.
그럭저럭 모아둔 돈도 있고 부모님도 얼마간 보태준다고 했지만 평당 수천만원이 넘는 아파트들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우리나라에 부자가 많구나’라고 새삼 느꼈다는 게 그의 말. 그렇게 며칠을 헤매다보니 어느새 결혼 생각은 쏙 들어가버렸고, 대신 담배와 한숨만 늘었다.
김씨는 “아파트가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한 곳 없더라”라며 “집을 알아보면서 매달 대출금은 얼마씩 갚아야 하는지 등을 따져보다가 허무함만 커졌다. 결혼은 꿈도 못꿀 거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스스로를 ‘비혼족’이라고 소개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비혼과 미혼, 비슷해 보이지만 쓰임새는 하늘과 땅 차이다. ‘비혼’이란 단어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 자못 비장하기까지하다. 그래서 ‘N포 세대’로 대변되는 청년들은 비혼의 등장에 환호했다. 더 이상 결혼 문제로 주변 눈치를 보거나, 자존감을 잃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욜로(YOLO)’ 현상과 맞물려 비혼족들은 기성세대와 달리 남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현재를 즐기는 ‘쿨’한 사람들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주변을 둘러보면 쿨함은커녕 신혼집 마련 등에 지레 겁먹어 일찌감치 결혼을 단념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에 일각에서는 ‘비혼’이란 단어를 청년세대의 자기방어 기제로 분석하기도, ‘N포 세대’의 다른 이름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자발적 비혼은 20%에 불과…”
실제 비자발적으로 비혼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결혼 상대자에 대한 높은 기대치와 여기서 비롯되는 경제적 부담감은 결혼을 외면하게 만드는 핵심 요인이다.
22일 강유진 총신대 교수의 지난해 연구에 따르면 비혼 성인남녀 중 자발적으로 비혼을 택하는 사람은 20%가량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 교수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자료를 분석해 비혼의 유형을 △결혼비용 부담형 △기회상실형 △불이익 부담형(결혼 이후 직장·가족생활에서 예상되는 압박감 등에 부담을 느껴 비혼을 선택) △자발형 등 4가지로 분류했는데, 이중 80%가 비자발적 비혼으로 파악됐다.
가장 흔한 것은 기회상실형(전체 응답자의 37.2%)이다. 이들은 △적당한 결혼 나이를 놓쳐서 △마땅한 배우자를 만나지 못해서 △시간이 없어서 △형이나 언니가 아직 미혼이어서 등을 비혼의 이유로 꼽았다. 이어 결혼비용 부담형(29.3%)과 자발형(20.7%), 불이익 부담형(12.8%) 순이었다.
결혼 상대방에 대한 높은 기대치는 이런 부담을 더욱 키운다. 결혼정보업체 듀오가 지난해 11월 미혼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상적인 남편’은 키 177.4cm에 연소득 4930만원을 벌고, 자산은 2억7286만원 이상을 가지고 있는 4년제 대졸 남성으로 나타났고, ‘이상적인 아내’는 키 164.3cm에 연소득 4206만원, 자산 1억8247만원을 가진 4년제 대졸 여성으로 나타났다.
특히 남성이 느끼는 경제적인 부담은 더 크다. 강 교수의 연구에서도 비혼의 이유로 남성은 ‘결혼비용 부담형’(43.2%)이 가장 많았지만, 여성은 ‘기회상실형’(40.3%)이 많았다. 강 교수는 “남성이 가족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아직 강해 경제적 여건이 결혼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남성에게 더욱 두드러진 것”으로 분석했다.
‘비혼족’인 직장인 이모(29)씨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세상인데 누군가를 책임져야한다는 게 부담이 크다”라며 “연애와 달리 결혼은 여러 각도에서 서로 재고 따져야 할텐데 그런 부분에서 솔직히 자신감이나 의지가 없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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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입 5000만원 이상 또는 공무원 남성과 20대 여성 한정 맞선. 젊은 여성을 찾는 남성과 경제력을 찾는 여성들 요구를 반영한 결과다. 사진=日 결혼 중매사이트 캡처 |
◆평행이론? 일본은 지금 ‘초솔로 사회’
가까운 일본도 사정이 비슷하다.
사실 일본은 2000년부터 벌써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독신붐’이 일었다. 이런 논의가 우리보다 10년쯤 앞섰던 것. 당시의 일본 젊은이들은 살인적인 물가와 취업난에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2000년대 중반엔 연애와 결혼은 꿈도 꾸지 않는 이른바 ‘초식남’, ‘건어물녀’가 등장했고, 이를 다룬 영화와 드라마가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1인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냉동식품이나 통조림, 초소형 가전제품 등 ‘솔로 이코노미’가 각광받기도 했다.
지난해 일본에서는 ‘초솔로 사회’란 단어가 유행했다. ‘초솔로사회-독신대국 일본의 충격’이라는 책을 써 이 말을 퍼뜨린 아라카와 카즈히사(54)는 “앞으로 일본에서 독신, 미혼 인구는 계속해 증가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실제 지난해 4월 일본에서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50세까지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의 비율인 ‘생애미혼율’(2015년 기준)은 남성이 23.4%, 여성은 14.1%였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비슷한 조사에서는 남성이 10.9%, 여성이 5.0%로 집계됐다.
결혼이 드물어진 두 나라, 비슷한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남성은 수입이 낮을수록 미혼율이 높은 반면, 여성은 수입이 많을 수록 미혼율이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다.
독신 남녀의 소비행태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아라카와는 일본의 미혼들이 소비가 왕성해진 것을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행위’로 파악하면서 “이들의 소비 기준은 물건이나 가치가 아니라 승인이나 성취감”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소비 패턴을 ‘에모(emotional·감정) 소비’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나라에서 지난해 등장한 ‘시발비용’, ‘탕진잼’ 등과 비슷한 쓰임새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미혼자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예로 40대 독신 남녀의 60%가량이 ‘결혼을 해야한다’는 규범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프랑스나 영국, 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20∼30%)보다 두 배가량 높은 수치라고 한다. 비슷한 조사가 없는 탓에 확신할 순 없지만 고전적인 결혼 규범이 여전히 작동하는 우리나라의 청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비자발적 비혼’, 방법 없을까?
한국의 ‘비혼족’, 일본의 ‘초솔로사회’ 모두 표현은 조금 달라졌지만 결국 ‘N포 세대’, ‘사토리 세대(득도 세대)’의 연장선에 있다.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의 태도란 것. 방법은 없을까. 우리보다 앞서 십수년째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일본은 발등에 불 떨어진 지 오래다. 지난해 일본에선 신생아 수가 94만여명으로 2년 연속 100만명을 밑돌았는데, 무려 118년 전인 1899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급기야 ‘사회붕괴’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전문가들이 우리나라의 ‘비혼족’ 현상을 일종의 사회 흐름 정도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청년들에게 많게는 3억원 정도의 전세 자금을 굉장한 저리(低利)로 장기융자해주는 제도나 결혼 지원금 혹은 결혼수당 제도, 보육비 인상 등 ‘파격적’인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파격’이 아니라면 현 상황을 타개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지난해 정부가 “2018년은 일자리 창출과 주거 안정 등 청년들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고 공언한 만큼 실효성 있는 정책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비혼족’이란 말로 그럴 듯하게 포장되고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청년들은 여전히 결혼을 원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각 시도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수행한 조사들을 살펴보면 미혼남녀 응답자의 60∼70%가량이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내심 희망마저 놓진 않은 셈. 부쩍 늘어나고 있는 비혼족들을 마냥 ‘소신 있는 젊은이’로 보기 어려운 건 이 때문이다. 앞으로 정부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