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02-15 16:07:33
기사수정 2018-02-15 16:07:32
미국의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북한의 ‘매력 공세’를 차단하는 악역을 맡았었다. 펜스 부통령은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일행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탈북자들과 함께 천안함을 찾는 등 북한 정권의 ‘위장 평화 공세’를 폭로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심지어 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동시에 입장할 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 ‘대국의 지도자답지 못하다’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런 펜스 부통령이 한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와 북·미 대화의 가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변신을 꾀하고 있다. 펜스 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를 믿고 있다”며 북·미 대화 분위기 조성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현재 트럼프 정부의 외교·안보팀에서는 대북 정책을 놓고 매파와 비둘기파가 치열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크 폼페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대표적인 매파이다. 이들은 미국이 북한의 핵·미사일 시설에 대한 제한적인 폭격을 가하는 ‘코피 전략’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들에 맞서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대화를 통한 북한 문제 해결 방안을 지지하면서 매파의 발목을 잡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온파의 대립 속에서 양쪽을 왔다 갔다 하는 엇갈린 행보를 보인다. 이 때문에 펜스 부통령이 대북 정책의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는 분석이 워싱턴 외교가에서 제기되고 있다. 펜스 부통령은 한국 방문 전까지는 매파 성향을 보였으나 이제 비둘기파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펜스 부통령의 입장 변화에는 그의 한국 방문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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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스 부통령이 지난 1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미 공화당 전국위원회 행사에서 연설하는 모습. 워싱턴=AP연합뉴스 |
◆대화론 설파
펜스 부통령은 한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항공기 기내에서 워싱턴 포스트(WP)와 단독 기자 회견을 통해 북·미 탐사 대화 필요성을 제기했었다. 펜스 부통령은 14일(현지시간)에는 인터넷 매체인 악시오스(Axio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우리를 확실히 이해하기를 원하고, 만약 그런 대화의 기회가 있으면 그들에게 미국의 확고한 (비핵화) 정책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북한이 비핵화 문제 등을 논의하는 미국과의 회담에 응할지 알아보는 ‘탐사 회담’ 을 갖자는 뜻이다.
펜스 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항상 대화를 믿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고, 대화는 협상이 아니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북·미 간 본격적인 회담을 하려면 서로 사전에 주고받기 식의 ‘선물 교환’ 등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양측이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일단 만나자는 게 펜스 부통령의 제안이다.
펜스 부통령은 “북한이 핵무기 추구를 포기할 때까지 북한과의 관계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라며 “북한이 완전히, 검증할 수 있게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이 비핵화에 진전을 보이지 않으면 대북 제재와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김여정과의 조우 회피 해명
펜스 부통령은 평창 올림픽 개막식에서 뒷줄에 앉은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을 외면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주최한 리셉션에서는 북한 대표단을 피해 5분 만에 자리를 떠나는 결례를 마다하지 않았었다. 펜스 부통령은 이날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나는 독재자의 여동생을 피하지 않았고, 그녀를 무시했을 뿐이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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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일 강원도 평창군 용평리조트 블리스힐스테이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사전 리셉션에서 헤드테이블에 앉아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리셉션 헤드테이블에 초청받았지만 행사장에 늦게 참석했고 5분 만에 자리를 떴다. 평창=청와대사진기자단 |
펜스 부통령은 “미국이 그 행사에서 그녀에게 어떤 관심이라도 표명하는 게 적절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북한은 지구 상에서 가장 폭압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이며 감옥 국가와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김정은 일가에 대해 “지금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종류의 악인들이고, 나는 침묵을 통해 우리가 다루는 게 누구인지에 대한 매우 명확한 메시지를 미국인에게 주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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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스·文대통령 쇼트트랙 예선전 관람 문재인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왼쪽)이 지난 10일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여 예선전을 관람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 제공 |
◆문 대통령-펜스 면담 내용
펜스 부통령은 한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워싱턴 포스트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한국 방문 동안 문재인 대통령과 두 번에 걸쳐 본질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과 펜스 부통령은 지난 8일과 10일 청와대와 평창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두 차례 만나 양자 협의를 가졌다. 워싱턴 포스트는 “펜스 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북한과 대화의 조건으로 북한에 양보했던 과거의 잘못을 국제 사회가 결코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문 대통령도 북한과 대화를 하려고 경제적, 외교적 이득을 제공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북한에 분명히 전달하겠다고 펜스 부통령에게 약속했다”고 전했다. 펜스 부통령은 이에 따라 ‘평창 이후’에 한국이 남북 대화에 나서는 것을 추인했다고 이 신문이 보도했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