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가 달라졌다.’ 지난해 여름 뮤지컬 ‘벤허’를 본 이들이 공통으로 떠올렸던 생각이다. 배우 겸 가수 아이비는 이전에도 무대에서 사랑스러웠다. ‘시카고’의 록시, ‘아이다’의 암네리스, ‘위키드’의 글린다 모두 능숙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벤허’에서 에스더로 분한 그가 노래한 순간, 공연장을 압도하는 힘이 느껴졌다. 이후 언론에서도 그의 후속작을 눈여겨보는 이들이 하나둘 생겼다. 새 작품 ‘레드북’으로 돌아온 그를 최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아이비는 이 얘기를 듣자 “정말요?”하고 여러 번 반문하더니 “그때 노래 늘었단 얘기 많이 듣긴 했다”고 말했다.
|
‘레드북’의 주연을 맡은 뮤지컬 배우 아이비는 “제게 작품이 계속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몹시 만족한다”며 “주변에 너무 잘난 사람이 많아 동료를 통해 자극 받는다”고 말했다. 하상윤 기자 |
공포증에 따른 긴장감은 극심했다. 무대에서 피가 전혀 안 통해 팔이 저릴 정도였다. 아직도 심장박동을 늦추는 처방약을 먹지 않으면 무대에 못 올라간다. 그는 “누가 나를 앞에서 보는 순간 그렇게 된다”며 “제가 생긴 게 당당하고 여시 같으니 남들은 ‘니가 무슨 무대 공포증이야’ 한다”며 웃었다.
“처음에는 ‘그만둬야 하나,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거 하다가 빨리 죽는 거 아냐’ 싶어 되게 슬펐어요. 이제는 계속 잘 되고, 나 잘난 맛에 살았으면 지금 주어진 일의 감사함을 몰랐을 거란 생각도 들어요. 더 열심히, 겸손히 할 기회라고 생각하니 받아들여지더라고요. 이제 전 욕심이 하나도 없어요. 제 약함을 깨닫고 제가 부족한 사람임을 알게 됐으니까요.”
그는 “저를 돌아보니 제가 못난 사람이란 게 매일 새롭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일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되새긴다. ‘무대에 서지 못해도 나는 사랑받는 존재고, 이게 아니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럼에도 뮤지컬을 고집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무대가 애증의 관계가 됐다”고 명쾌하게 답했다. ‘사랑하는데 아프고 미운’ 남녀관계 같단다. 2005년 가수로 데뷔한 아이비는 2010년 ‘키스 미 케이트’의 조연으로 뮤지컬과 인연을 맺었다.
“떠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돼요. 무대에서 박수 받을 때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되는데, 무대에 서기 전 두려움과 공포는 너무 힘겨우니까요.”
무대를 지키고 싶다는 그는 “제가 가진 밝은 느낌을 관객에게 주고 싶다”며 “(이전 출연작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처럼 최악의 비극이어도 ‘저 여자가 너무 밝아서 힘든 일을 딛고 일어서는구나’ 느껴지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 그가 연기하고 있는 ‘레드북’의 안나 역시 씩씩한 여성이다. 보수적인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해 글을 쓴다. 자신의 욕구를 발랄하게 표현하며 금기에 맞선다.
“여자가 글 쓰는 것조차 금지된 시대에 그렇게 당당, 당돌하고 깨어 있는 여성이라니. 이건 우리 모두의 얘기일 것 같아요. ‘세상의 편견을 깨고 당당해져라, 앞으로 나와라’라는 메시지니까요. 전 사실 편견에 맞서거나 당당하게 나서는 걸 잘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불리한 일을 당해도 ‘왜 그래야 돼’라고 못해요. 안나를 만났으니 저도 용기 있는 사람이 돼 불공정과 편견에 맞서 싸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레드북’을 하며 그는 사회문제를 공부하고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소셜미디어(SNS)에 패션·요리 같은 것만 올리다가 다른 걸 올리면 사람들이 거부할지도 모른다”고 농담한 그는 “나도 사회·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인데…”라고 덧붙였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