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02-20 06:00:00
기사수정 2018-02-19 21:39:32
국제사회 우려 목소리 쏟아져/국가 핵심이익 수호 명분 무차별 압박/경제 과실 대가 접근… 체제 비판 물타기/포브스 中 관련기사 편집권 훼손 정황/獨언론 “의원 등 포섭 스파이 활동 벌여”/자국진출 기업엔 노골적인 불만도 표출/홍콩 등 독립국가로 분류 땐 거센 항의/ 中관영매체 "서방이 만든 학술적 개념"
#1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는 총리 임기 동안 ‘중국과 영국의 황금기’를 선언할 만큼 중국과의 좋은 관계 유지에 고심했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이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영국, 미국, 호주 등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을 상대로 겁주는 정책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며 중국의 강압적인 압박이 캐머런 전 총리의 친중국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고 지난 1월9일 보도했다. 캐머런 전 총리는 2012년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만난 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이후 중국이 보복할 것이라는 단순한 두려움이 영국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발했다는 것이다.
#2 미국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12월14일 ‘미국 유력 잡지의 편집권이 중국 자본에 침탈당했다’며 포브스가 반중 성향 칼럼니스트의 계약을 해지하고 해당 칼럼니스트의 기존 칼럼들도 삭제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중국계 미 변호사인 고든 창과 중국 전문가로 알려진 앤서스 코르의 계약해지 사례를 거론했다. 포브스가 2014년 홍콩 주재 인티그레이티드 웨일 미디어사에 인수돼 중국계 자본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중국 관련 기사에 대한 편집권의 훼손 정황이 여러 군데에서 포착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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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바이두 홈페이지 캡처 |
중국이 은밀하게 행사하는 샤프파워(Sharp Power)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샤프파워란 중국의 음성적인 영향력 행사를 의미한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하드파워(Hard Power), 문화적인 차원의 소프트 파워(Soft Power)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중국이 막대한 경제력과 시장을 무기로 강압, 회유, 협박 등을 통해 기업 또는 국가에 위협을 가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미국 비영리 싱크탱크인 ‘민주주의를 위한 국립기금’(NED)은 권위주의 국가들이 협박과 교묘한 여론·정보 조작을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면서 샤프파워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샤프파워에 우려 쏟아내는 서방
서방 언론이 중국의 샤프파워 전략에 앞다퉈 우려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중국 경제력이 팽창하고 대외교류가 확장하면서 중국에 대한 친밀감보다는 경계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WSJ는 지난해 12월12일 “중국이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고압적인 간섭과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며 “서방이 이제 중국에 대한 진실을 깨닫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수십년간 서방은 중국의 발전을 지켜보며 권위주의 공산당 지배체제의 중국이 경제개방 및 생활수준 향상과 함께 민주주의 등 서방의 가치를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조지 로긴도 “중국이 체제에 대한 비판을 완화하고자 서구 정치인들에게 경제적 과실을 대가로 접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지난해 12월 서방국가에 대한 중국의 샤프파워 전략의 작동원리를 보도하고 구체적인 대응방법을 제시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중국은 압박, 회유, 위협 등을 통해 해당 국가나 대상 기관의 자기검열을 유도한다.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과 시장진입 및 사업권, 정보 접근권 등을 매개로 중국에 알아서 복종하라는 암묵적인 경고가 샤프파워의 실체라고 분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연합(EU)에서 그리스가 중국 인권결의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그리스 항만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받은 사례를 들었다. 또 호주의 한 출판사가 중국 샤프파워가 두려워 중국 비판 서적을 회수한 경우도 있다고 소개했다.
◆정치인·대학·연구소·기업 등 무차별 압박
사기, 매수, 압박을 통해 각국 내정에 간섭하려는 시도는 대표적인 샤프파워다. 독일 언론은 중국 정보기관이 “독일과 유럽 의회의원, 군 고위관리, 연구기관 대표 등을 포섭하려는 활동을 벌였다”고 지적했다. 독일 정보기관인 연방헌법수호청(Bfv)은 지난해 12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고리로 중국인 스파이들이 독일 공무원과 의원 등 1만여명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냈다”고 경고했다. 영국에서도 중국과 경제적 교류가 있는 정치인에게 중국 요원이 접근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호주는 중국의 침투에 몸살을 앓고 있다. 야당 의원이 중국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중국계 부동산 재벌과의 유착관계가 드러나 사임했다. 이에 호주 정부는 외국인이나 외국 기관이 국내 정당 및 정치단체 후원을 금지하는 법률도 제정키로 했다.
뉴질랜드에서도 현역 중국계 의원이 스파이 교육을 받은 이력을 숨긴 채 의원활동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와 관련해 단체관광금지 등 경제교류를 고리로 한국을 압박한 것도 명백한 샤프파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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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텍사스 주립대, 中 기부금 거부’ 보도 미국 언론 ‘브라이트바트’(Breitbart)는 지난 1월16일 “미 텍사스 주립대가 중국 기부금을 거부한다”고 보도했다. 브라이트바트 홈페이지 캡처 |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는 중국의 영향력 행사와 학문의 자유 침해를 우려해 미중교류재단(CUSEF)의 자금 지원 제안을 거절했다. CUSEF와 중국 정부의 관계를 걱정한 것이다.
중국은 자국시장에 진출한 기업에 대해서는 더욱 노골적이다. 독일 자동차업체 메르세데스벤츠는 지난달 6일 인스타그램 광고에서 달라이 라마의 명언을 광고 카피로 사용한 것과 관련해 “중국 국민의 감정에 상처를 줬다”며 사과했다. 지난달엔 세계 유명 호텔 체인업체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이 고객대상 설문조사에서 홍콩과 마카오, 대만, 티베트를 독립 국가로 분류한 것과 관련해 중국측 항의를 받고 사과했다. 스페인 패션 브랜드 자라와 호주 항공사 콴타스, 미국의 델타 항공도 대만을 국가로 표기한 일로 사과했다.
중국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이나 서방 기업과의 인수합병(M&A) 시도가 잇따라 무산되는 것도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조치다. 중국 스마트폰업체인 화웨이가 미국 이동통신 업체인 AT&T를 통해 미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하려던 계획이 백지화된 것이나 미국 송금회사인 머니그램에 대한 알리바바의 M&A 계획이 무산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일 경제부도 최근 중국 국유기업인 중국강연과기그룹(中國鋼硏科技集團)의 자회사가 독일 항공기 부품 제조사인 코테자(Cotesa)를 인수하는 안을 보류시켰다.
◆중국 “서방이 만들어낸 허구의 개념” 반박
중국 사프파워 전략은 중국의 핵심이익 수호와 관련이 깊다. 중국이 주장하는 핵심 이익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국가적 이익의 영역이다. 중국 정치제도 및 국가안보 보전, 국가주권과 영토안정, 그리고 경제 및 사회의 지속적 발전 등 크게 3가지 영역을 핵심 이익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대한 도전이나 위협이 있다고 판단될 때 서슴없이 샤프파워가 행사된다.
중국의 대외정책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세상을 뜨면서 당부한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벗어나 이제는 분발유위(奮發有爲)에 이르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6년 10월 ‘주변국 외교공작(업무) 좌담회’에서 분발유위를 직접 거론했다. 분발유위는 ‘중국에 이익이 되는 일이면 적극 분발한다’는 의미다.
중국은 샤프파워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이나 서방국가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학술적 개념이라는 입장이다. 중국 급부상에 위협을 느끼고 중국의 세계적인 도전을 억제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용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호주의 반중국 정책에 대해 중국 관영언론이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을 연상시킨다”고 반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 관영 글로벌 타임스는 1월29일 사설에서 “샤프파워는 서구 미디어가 중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주관적 가치판단에 불과하며, 서구의 편견을 보여주는 ‘의사 학술적’(pseudo-academic) 개념”이라며 “중국은 중국적 가치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호주는 중국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이면서도 중국에 대한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했다.
베이징=이우승 특파원 ws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