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03-16 03:00:00
기사수정 2018-03-15 21:06:43
한승원 산문집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
“돌아보니까 저는 늘 길을 잃었더라고요. 길을 잃었다가 찾고 다시 잃었다가는 찾는 그런 일이 지금도 저에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길을 잃지 않고 완벽하게 산다면 신이죠. 인간이기 때문에 늘 길을 잃고 다시 각성을 하고 길을 찾는데, 그 기록이 이 책이고 인생살이입니다.”
22년 전 고향 인근 해남 바닷가로 내려가 집필해 온 소설가 한승원(79)이 그의 삶과 집필 여정을 산문집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불광)에 담아냈다. 산문집 출간을 계기로 상경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삶은 끝없이 산정으로 바위를 밀어올리기를 반복하는 시시포스의 행위와 같았다고 술회했다. 장흥 출신 화가 김선두의 그림을 군데군데 삽입하고 한승원의 옛 사진들도 곁들여 편집한 산문집에는 남쪽 해변 토굴에서 사는 자연인 한승원의 우주를 향한 예술적 열정과 성찰이 빼곡히 담겨 있다.
그는 집필실 마당에 서 있는 이백 살쯤 된 늙은 감나무 한 그루와 나눈 대화 형식으로 서문을 채웠다. 감나무는 여성으로 설정되거니와 ‘그녀’는 한승원에게 하필 그의 토굴 마당 한복판에 서 있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우주에 뿌리를 뻗고 우주의 율동 같은 삶의 원리를 시로 풀어내는 시인인 네가 이 집의 주인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녀에게도 꿈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시 쓰는 자네가 나를 쳐다보며 사유하고 명상한 결과 큰 작품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진정으로 좋은 시인은 식물성 아나키스트이어야 한다”고 대꾸한다. 결국 이 생에서 한승원의 가장 큰 소망은 ‘우주의 율동’을 글이라는 도구로 받아내는 것이다.
‘해산토굴’이라고 명명한 집필실은 감나무 소나무 대나무들과 더불어 다양한 화초들이 에워싸고 있다. 앞으로는 득량만 여닫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공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내는 시인 겸 소설가의 생각들은 지나온 삶의 편린들과 더불어 깊은 사유로 산문집에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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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전남 해남 고향 마을 인근에 ‘해산토굴’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집필에 전념해온 소설가 한승원. 팔순에 이르러 그 삶을 산문집에 담아낸 그는 “산문은 시나 소설처럼 성장(盛裝)하지 않고 맨몸으로 세상에 나가는 듯한, 솔직하면서도 신화적 철학적 발언이 가능한 장르”라고 말했다. 불광출판사 제공 |
한승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도와 삼 년 동안 김농사를 비롯한 노동을 했는데, 그 당시 밤바다에서 숙부의 배를 끌고 어둠 속을 헤매던 경험을 통해 말한다. ‘나를 이 어둠 속에 묻어두는 것도 나이고 나를 그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도 나’라고.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 대처로 나와 문학을 공부해 등단한 뒤 소설에 ‘미쳐서’ 살아왔다. 젊은 시절부터 내내 서재 바람벽에 ‘광기(狂氣)’라는 표어를 붙여놓고 살았다는 그는 “좋아하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은 미치는 것”이라며 “미치면 성취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꽃도 물도 도전적으로 피고 도전적으로 흐른다고 덧붙였다. 산문집에는 이렇게 썼다.
“우리들의 삶은 물처럼 흘러야 한다. 밥도 물이고 글도 물이고 삶도 물이다. 막힘없이 흘러야 썩지 않는다. 돈도 흐르고, 문화도 흐르고, 정보도 흐르고, 우리들의 생각도 흘러야 한다. 우리들의 몸도 물처럼 흘러야 한다. 그 흐름이 꽃처럼 공격적으로 피어나야 한다. …물은 앞을 막으면 가득 차서 넘치거나 돌아서 흘러가고 꽃은 망울로 맺힌 다음 총포처럼 터진다. 그것은 순리인데, 따지고 보면 매우 도전적이다. 해와 달과 별들도 도전적으로 운행한다. 그것은 우주의 율동이고 그들의 운명이다.”
마침 한승원의 딸인 소설가 한강이 소설과 시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 ‘흰’으로 다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에 그는 “흰 것에 대한 총체적인 느낌은 강이와 비슷하지만 저는 좀 더 리얼리즘 쪽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그 아이의 세계는 신화적이고 훨씬 환상적인 쪽에 가깝다”면서 “그 아이의 작품을 읽으면서 제가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딸의 ‘승어부’(勝於父)를 뿌듯해하는 아버지이지만, 딸의 뿌리가 아버지임은 자명하다. 아버지 한승원은 ‘흰’ 그게 시(詩)라는 산문에서 창밖에 흐드러진 ‘산 백목련’의 삶을 시로 옮겨 썼다. ‘산 목련’에서 무당집 큰신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며 그녀의 신딸들이 흰 꽃상여 메고 가며 부르는 상엿소리를 듣는다.
말미에 부록으로 붙인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주는 편지’에서는 그가 지난겨울 병상에서 ‘병을 미끼로 시와 신을 낚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는 “시인 소설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가, 혹은 지성인들은 자유자재한 우주주의자여야 하고, 환상적인 리얼리스트여야 하고, 식물성 아나키스트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시인 소설가의 존재를 이렇게 정의했다.
“시인 소설가는 천기, 혹은 신의 뜻과 우주의 비밀작법을 읽어내는 존재여야 한다. 시인 소설가는 천기(신의 뜻, 우주의 비밀 작법, 혹은 율동) 누설자, 영원의 빛을 읽어내서, 그것을 미처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 누설(발설)하는 자이다. 영원의 빛은 진리 그 자체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