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04-07 03:00:00
기사수정 2018-04-06 19:46:30
자유주의가 ‘진리’였던 1950년대 초/ 러셀 커크, 미국 보수주의의 틀 확립/“이데올로기 아닌 인류정신의 계승/ 영원한 것들을 지키려는 노력”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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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커크 지음/이재학 옮김/지식노마드/3만6000원 |
보수의 정신 - 버크에서 엘리엇까지/러셀 커크 지음/이재학 옮김/지식노마드/3만6000원
‘보수’란 말이 국내 정치판에서는 오염되고 있다. 보수라고 자처하는 국내 정치인들은 보수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른다.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유권자의 눈길을 잡기 위해 그저 떠들어대곤 한다. 보수 야당은 건전한 보수니 진정한 보수의 가치 등 말의 성찬만 늘어놓곤 한다. ‘내 주식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보수’라는 황당한 소리도 들린다. 언필칭 ‘건전 보수와 좌파 정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분법적 논리를 갖다 붙히곤 한다. 국내 신문에 기고한 어떤 학자는 ‘보수포퓰리즘’이라는 웃기는 말도 쓴다. 보수란 포퓰리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말이다.
한국전쟁 이후 급속히 국내에 전파된 ‘보수’ 또는 ‘보수주의’는 사실 미국과 영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보수 정당이 없다. 보수를 보수답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은 20세기 미국과 영국 보수주의의 계보를 이어가면서 보수의 의미를 정리했다. 보수가 가장 많이 회자됐던 시기는 20세기였다. 20세기 초반 마르크스·레닌 사상으로 대변되는 공산주의에 맞서는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이론가이자 사회비평가였던 저자 러셀 커크(Russell Kirk, 1918∼1994)는 이 책을 써서 미국 보수주의 틀을 제공했다. 1950년대 초반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당시 일약 선풍을 일으켰다. 그의 사망 직후인 1995년 러셀 커크 센터가 미시간주 메코스타에 설립되어 그의 유지를 기리고 있다. 센터에는 보수란 ‘지켜야 할 영원한 것들’이란 해석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보수란 이런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커크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1729∼1797)를 ‘가장 위대한 보수주의 사상가’로 평했다. 버크는 1790년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을 출간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보수주의를 창안했다. 책에는 존 애덤스, 알렉산더 해밀턴, 존 칼훈, 벤저민 디즈레일리, 아서 밸푸어,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월터 스콧, 알렉시스 드 토크빌, 너새니얼 호손, 조지 기싱, 로버트 프로스트, T S 엘리엇까지 걸출한 보수주의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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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러셀 커크는 자유와 방종이 주류 사조였던 1950년대 뉴욕 지성계에 보수주의 참된 의미를 외치면서 무책임한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의 퇴치를 주창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버크는 진보세력이 주도한 사회 개혁의 맹점을 일찍이 간파했다. 사회 발전을 위한 개혁이 사회 그 자체를 망가뜨리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읽어낸다. 토크빌은 다양성이라는 미명 아래 획일과 평범함이라는 민주주의의 모순을 가려낸다. 존 애덤스는 민주주의란 방종 대신 규범적 자유를 옹호한다. 이들 보수주의자는 민주주의로 포장된 ‘자유’가 초래할 위험과 폐해를 이미 통찰한 것이다. 지금 이들의 예견이 맞아들어가는 듯 하다. 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는 마치 주어진 소명을 다했다는 듯 여러 가지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 보수주의자들의 선견이 돋보이는 이유이다.
저자는 이 책을 막 출간하자마자 “미친 짓”이라고 비난받으며 뉴욕 지성계에서 축출됐으나 이 책이 던진 파장은 컸다. 당시 ‘타임’지는 “미국인들에게 보수주의는 주식과 배당금을 지키는 것보다 더 깊은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고 평하며 대서특필했다.
저자는 보수주의를 몇 마디 문장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보수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마음의 상태이며 사회 질서를 바라보는 방법이라고 풀이한다. 이어 “보수주의는 인류의 정신적이고 지적인 전통의 계승이자 ‘영원한 것들’을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저자는 보수주의의 핵심 가치를 6가지로 정리했다. 초월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며, 획일성과 평등주의를 배격하며 인간 다양성에 대한 애정이다. 이어 질서와 위계가 필요하며, 자유와 재산은 연관되어 있다는 신념이다. 추상적인 설계가 아니라 법률과 규범을 중시하며, 급격한 개혁보다 신중한 개혁을 선호한다는 것 등이다. 여기에서 자유와 재산 언급 부분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저자는 “위대한 문명은 사유재산권을 토대로 수립된다”면서 “사유재산제도, 사적소유권은 인류에게 책임감을 가르치고 성실함의 동기를 제공하며 생각할 여가와 행동할 자유를 제공해준 강력한 도구”라고 풀이한다.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현대인들을 ‘거인의 어깨 위에 있는 난쟁이’로 평가한다. 그들(현대인)의 조상보다 멀리 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앞서 살았던 인물들의 위대한 능력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 보수주의를 이보다 잘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옮긴이는 이렇듯 훌륭한 저서가 아시아에서 한 번도 완역되지 않았으며 일본에서도 최근에야 번역에 들어갔다고 소개했다. 보수주의 회복를 위해 필독해야 할 저서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