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김유찬 "회유 비서, MB에 수시보고…2007년엔 친이계 내세워 위증교사 없는 것 만들어"

[추적스토리-이명박 첫 고발자 김유찬 인터뷰中-②]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종로구 이명박 신한국당 후보의 정당연설회장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2년간의 재판으로 지칠 대로 지쳤고… 장기 실직 상태로 가정은 이미 엉망진창이 돼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나의 궁박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했다. 생활비 지원을 명목으로 목줄을 좼다. 나는 양심을 파는 대가로 이 전 대통령 측이 건네는 생활비로 목에 풀칠하며 재판 과정을 무기력하게 지냈다. 이 전 대통령은 돈의 힘으로 모든 진실을 틀어막았다.”

구속기소된 이 전 대통령의 다스 실소유주 의혹 등을 처음 세상에 알렸던 김유찬 SIBC(SIBC international Ltd) 대표는 1996년부터 2년여간 재판을 받으며 이 전 대통령 측의 ‘유혹’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 대표는 2007년 이 전 대통령이 선거법 재판 과정에서 위증을 교사했고 1억2000여만원을 받은 대가로 실제 위증을 했다고 공개했다. 양심의 가책을 못 견뎌 택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가는 잔인했다. 공직선거법 위반 및 무고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김 대표는 징역 1년2월을 선고 받았다. 2008년 9월, 그는 죄인이 됐다. 누가 어떻게 다스의 실소유자 문제를 처음 제기한 고발자 김유찬을 범법자로 만들었을까.

김 대표는 11일 세계일보와의 이메일 및 전화 통화를 통해 이 전 대통령이 재판 과정에서 거액을 주고 위증을 교사했고 실제 중요한 위증도 이뤄졌다는 자신의 2007년 주장은 “분명한 사실(fact)”이었다고 재확인했다.

특히 김씨는 2007년 대선 당시 이같은 사실을 공개했지만 당시 친이계 인사들로부터 ‘제2의 김대업’으로 비판받고 측근 인사들이 조직적인 위증으로 오히려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구속돼 유죄판결을 받으면서 이 전 대통령의 재판 위증교사는 없는 것이 돼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김 대표와의 일문일답. 

1996년 9월10일 새정치국민회의 중앙당 당사에서 종로 선거구 부정선거 양심선언 기자회견 중인 김유찬 전 비서관. 김유찬 대표 제공
◆“위증 회유 L비서관, 대화 중간마다 MB에 보고”

―먼저 1996년 양심선언을 언급안 할 수가 없는데.

“이 전 대통령과 ‘맞장’을 뜨기로 결심한 1996년 9월 초순. 한참 자라나는 애 둘 달린 가장이어서 며칠을 고민 끝에 ‘정치적인 보호막’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보호막을 당시 신한국당의 카운터파트인 새정치국민회의로 정했다. 이종찬 부총재와 함께 9월 9일 저녁 11시경 김대중 총재의 일산자택을 찾았다. 김 총재가 ‘파자마 바람’으로 나를 맞았다. 20여분간 면담을 했고, 그는 내게 ‘김 동지와 같은 젊은이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앞당길 수 있다. 당 차원에서 보호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격려를 해줬다. 9월 10일 오전 11시 새정치국민회의 중앙당 기자실에서 이 전 대통령을 향한 첫 활시위가 내 손에서 떠났다. 돈으로 권력까지 사려한 종로 부정선거에 대해 한 젊은이의 분노의 몸짓이자 항거였다.”

―새정치국민회의의 보호 생활은 어떠했는가.

“국민회의측의 보호를 받고 있는 사이 끝없는 번민에 빠졌다. 가족 안위가 가장 걱정이 됐고 함께 일하던 선거캠프의 동지들에게 가장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국민회의의 보호도 말이 보호지 서울 홍제동 힐튼호텔에 방 하나 잡아주고 50만원이 든 봉투 하나 집어던져 놓고선 거의 방치 수준이었다. 이 전 대통령을 공격했지만 그렇다고 국민회의 측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직관대로 행동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패착이었다. 정치적으로 어리고 감정적이었다. 가까스로 선거캠프에서 함께 하던 옛 동지들과 연락이 닿았다. 서울 서교동 서교호텔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이 자리에는 (이 전 대통령의 측근 인사였던) L비서관과 K부장이 나왔다. 내게 입힐 여장(女裝)이며 콧수염 같은 분장도구까지 준비해 왔다. 나는 단지 미안한 감정을 전달하려 나간 것이었는데….”

―그들과 무슨 일이 있었나.

“이들은 나를 서울에서 뚝 떨어진 대전 유성의 한 호텔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내게 내일 당장 해외로 출국해주면 자신들이 알아서 뒷수습을 하겠다고 회유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K부장은 ‘기자회견을 부인하는 편지’를 하나 써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L비서관은 대화 중간 중간에 밖으로 나가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들어왔다. K부장이 이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이라고 일러줬다. ‘아 (이 전 대통령이) 시킨 거구나’ 짐작으로 알게 됐다.”

◆“MB, 자신들이 요구한 사과편지 흔들어”

―사과 편지를 쓴건가.

“(이 전 대통령 측이) 하도 거절하기 힘든 청을 해 하는 수없이 A4용지에 편지를 하나 썼다. K부장이 이 내용으론 안 된다며 다시 써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버텼다. 하룻밤을 함께 지낸 후 다시 집요하게 요청했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 K 부장이 다시 편지내용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어차피 다 덮고 나가는 판에… 구술하는 대로 편지를 다시 썼다. 나중에 이 전 대통령은 내가 사과 편지를 쓰고 자발적으로 출국했다고 많은 기자들 앞에서 편지를 직접 흔들어 댔다고 하더라. 전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수정된 편지를 받아든 K부장이 마지막에 나를 쳐다보면서 ‘김비(김유찬) 미안하다. 니가 출국하면 이 전 대통령이 너를 좀 씹을 거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해외로 출국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

“그때 (이 전 대통령 측의) 회유대로 해외로 출국하면 안 될 일이었다. 끝장을 봤어야 할 일이었다. 지금도 그런 일처리를 후회한다. 홍콩을 거쳐 캐나다에 머물며 국내 추이를 예의주시했다. 이 전 대통령은 ‘MB언론장학생’을 총동원해 나를 ‘아주 나쁜 사람’ ‘주군을 배신한 자’로 만들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귀국길에 올라 검찰청으로 직행했다. 이 전 대통령도 마지막으로 소환돼 옆방에서 조사 받고 있었다. 밤샘 조사를 받던 중 화장실을 갔는데 거기서 이 전 대통령과 마주쳤다. 이 전 대통령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 당신하고 나는 이런 곳에서 만나면 안되는데….’ 나나 이 전 대통령이나 운명이 기구했다.”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한 파트너 회사 기가크레타(GigaCrete)사를 방문해 CEO와 협의를 하고 있는 김유찬 대표. 국내에서는 군인공제회 팀들이 함께 동행했다. 김유찬 대표 제공
◆“양심 판 대가로 1억받아 쌀 사고 아이 학비”

―재판하는 과정에서 위증교사는 언제 어떻게 진행됐나.

“이 전 대통령 측은 재판과정에서 또다시 집요하게 접근했다. 어떻게든 내 입을 막으려 혈안이었다. 이번에는 (이 전 대통령 측이) K국장과 J부장 등을 동원했다. 선고공판을 전후해 서울 근교 등으로 불러내 이런 저런 식으로 진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총 1억2500만원 정도가 내게 건네졌다. 나는 양심을 판 대가로 이들이 건넨 돈으로 아이들 학비며 쌀을 사 가족을 부양했다. 위증의 대가로 돈을 건네받을 때마다 이를 아내에게 전달하고 그날은 괴로워 집밖으로 나와 통음을 하며 가족 몰래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내 인생을 처음으로 저주했다. 참 부끄러운 장면이었다.”

―재판 이후는 어떻게 됐는지.

“1998년 2심 선고가 있었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벌금 700만원이 선고되자 (이 전 대통령측은 나에게) 그간 매달 건네지던 생활비 등 모든 음성적인 경제적 지원을 일시에 중단됐다. 효용가치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해 6월 3일 서울 영포빌딩 사무실을 찾았다. (당시 지방선거에 출마를 준비 중이던 나는) 그와 불편했던 과거를 훌훌 털고 가고 싶었다. 지방선거에 출마한다고 그에게 알렸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입에서 제3자 화법에 의한 살해협박이 쏟아져 나왔다. ‘야! 개XX 왜 왔어… 주변 사람들이 손과 발을 묶어 인천 앞바다에 수장시키자는 걸 내가 말렸다.’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내게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를 찾은 것을 후회했다. 영포빌딩을 나오며 즉각 상소장을 제출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에게 불리하지 않게 증언하거나 위증한 것도 크게 후회했다. 결국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대법원은 유죄를 확정했다. 그는 먼저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친이계, 나를 제2김대업으로 몰아...선관위 검찰 겁박”

―2007년 기자회견을 통해 이 전 대통령의 위증교사 혐의를 공개했는데.

“부끄럽고 말하기 힘든 자기부정의 고백이었다. 개인적인 창피함과 부끄러움보다는 (당내 대선 후보로 출마한) 이 전 대통령의 집권을 어떻게든 막아야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통령의 ‘4인방 호위무사’들이 공격해왔다. ‘제2의 김대업’이라고 몰아붙였다. 이 전 대통령이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후 나는 홀로 외롭게 한나라당 선대위 소속 180명의 율사들과 싸워야했다. 달걀로 바위치기였다.”

―오히려 피소되는데.

“당시 J, P의원과 권모 지구당 사무국장 등 친이계 인사들이 언론에 나와 ‘김유찬이 먼저 돈을 요구했다’는 등 완전히 파렴치한 사람으로, '제2의 김대업'으로 몰아가더라. 또다른 J의원은 ‘제 사무실을 얻어준 게 박근혜 후보’라고 하더라. 기가 막혔다. 네 사람을 즉각 고발했다. 이들은 한편으로 국회를 통해 선관위를 압박, 선관위가 검찰에 고발하도록 했다. 검찰 입장에선 저는 고소인이기도 하지만 선관위의 피고소인이 됐다. (검찰은) 선관위가 고발한 내용은 일체 조사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까 검찰이 권력의 향방에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거다. 이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될 것 같으니 검찰 분위기가 싹 바뀌더라. 8월 9일, (검찰이) ‘오늘 이 시간부로는 피의자가 됩니다’라고 그러더라. 3시간 동안 피의자 조사를 받았다. 재판에서도 검찰이 노골적으로 이 전 대통령 편을 들더라.”

―누가 검찰을 움직인 것인가.

“8월 9일 최환 전 서울지검장이 저를 불러서 ‘친이계가 계속 검찰총장부터 지검장까지 전화를 해 정권이 넘어오는데 김유찬 때문에 재 뿌리게 생겼으니 입을 틀어막아라, 없는 문제를 만들어서라도 잡아 넣으라고 들들 압박한다, 볶고 있다’고 직접 얘기를 하더라. 이건 팩트다.”

◆“MB 측근들 조직적 위증...위증교사 없는 것 만들어”

―재판은 어땠는가.

“2007년은 이 전 대통령 쪽 사람들이 전부 다 새빨간 위증을 하더라. 공소사실에 합당한 검찰측 증인이 나와 죄다 저에게 뒤집어씌우고 위증을 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위증을 하더라. 증인들이 나와서 다 일사분란하게 위증하지, 검찰은 제가 제출하는 서류는 전부 다 증거능력을 배제하지, 그러니까 꼼짝없이 이른바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돼 있더라. (이 전 대통령측) 증인들은 모두 짜맞춘 듯 하나같이 위증으로 일관했고 이들의 조직적이 위증 덕분에 오히려 내가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인 양 죄가 뒤집어 씌어졌다. 여럿이 작당해 한 사람 바보 만드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걸 실제 내가 체험한 것이다.”

―2007년 이 전 대통령의 권영옥 지구당 사무국장이 “내가 (김유찬에게) 위증을 교사했다”고 발언한 내용의 CD와 녹취록이 보도되기도 했는데.

“권씨는 비서관 시절 직속 상사였다. 인간적으로 좋은 분이다. 하지만 2007년 내가 기자회견한 후 그는 이 전 대통령을 보호하고 옹호했다. 나를 푼돈이나 요구한 아주 치사한 인간으로 언론에 매도했다. 그는 이명박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 됐다. 그가 당시 왜 나를 매도했는지 생각해보니 자신의 여동생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나는 보고 있다. 다스의 대주주로 돼 있는 자신의 처남(김재정씨)과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그는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고 구조적으로 이 전 대통령의 편에 서야했던 거다.”

―2007년 이 전 대통령의 위증교사 혐의가 밝혀졌다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당연히 안됐을 것이다. 법정 위증죄는 사법질서를 교란하는 가장 죄질이 나쁜 죄다. 위증을 교사했다는 것은 대통령으로 해선 절대 안될 일이다. 이 전 대통령이 위증 교사하고 모든 걸 했음에도 검찰과 법원이 면죄부를 줘버리는 것이다. 국민들이 그런 내막을 다 압니까? ‘김유찬이 거짓말해 구속됐구나’하고 생각하지.”(계속)

하정호 기자 southcross@segye.com
영상=이우주 기자 space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