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4년, 슬픔에서 기억으로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둘째 딸 유예은 양을 잃은 아버지 유경근씨는 언젠가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한 추모 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습니다.
“저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잊혀지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잊혀지고 우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가장 큰 위로는 잊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 그건 기억하는 것이요 기록하는 것일 겁니다. 1년 뒤에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2년 뒤, 3년 뒤, 10년 뒤, 100년 뒤에도 기억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록하는 길이라 저희는 믿습니다.
세계일보는 이에 세월호 4년을 맞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세월호 이야기를 최대한 채록하거나 인터뷰해 공유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지지를 부탁합니다.
*자신만이 기억하는 세월호 이야기나 기억, 관련 자료가 있다면 세계일보로 사연이나 자료를 보내주십시오.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독자 모두와 공유하겠습니다. 보내실 이메일은 kimgija@segye.com 또는 homospiritus1969@gmail.com, 전화 번호 02-2000-1181.
◆“촛불 뿌리는 세월호...인권 존중 사회를”
경희대 교수 임채원(51)=“당일 오전 9시를 조금 넘어 서울대 규장각에서 교수 한 분과 미팅을 하다가 세월호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처음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큰 일 있겠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큰 배가 아직 바다 위에 떠 있고, 텔레비전에서 중계해줄 정도면 경찰이나 해군, 민간인 등이 가 구출할 것 아니냐고 생각했던 거다. 더구나 학생들이 대규모로 탑승했으니까 사전 교육도 했을 것이고, 조끼도 입고 있을 것이어서 당연히 구출되겠지라고 생각한 거다.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특별한 경험을 하나보다’ 이런 정도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오전 11시쯤인가 다 구조됐다는 보도도 있어 ‘아, 다 구출됐나 보다’ 라고 한때 생각했다. 오후 2시가 넘어가니 잘못된 보도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텔레비전 생중계를 하더라. 그 이후에는 다른 것을 전혀 하지 못하고 그것만 보고 있었다. 딸이 당시 고3 학생이었는데 사고가 난 아이들은 고2 학생들이어서 우리 딸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고 뒤 그해 8월쯤 동료 교수들과 같이 현장을 찾아갔다. 체육관에도 가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더라. 가을엔 차를 빌려 한번 더 갔는데, 그때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더라. 노란 리본이 쫙 깔려 있고 성당이 생겨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 한 사람이 지키고 있더라. 연구자여서 텍스트로 트렌드를 분석해보면, 각종 공공성 지표가 늘어가다 세월호 사고가 있었던 2014년 뚝 떨어졌다가 2015년 회복되는 ‘세월호의 계곡’이라는 게 있었던 게 기억난다.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되돌아보면 2016년 켜진 촛불의 뿌리는 세월호가 아닌가 생각한다. 촛불집회도 분석해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3월10일) 직후인 2017년 3월11일 제20회 촛불집회가 있었고 그 이후 3번의 집회는 사실상 세월호 추모 집회였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공감했던 것 같다. 또 촛불집회가 폭력적으로 가지 않고 평화적으로 된 것도 세월호의 트라우마가 아닌가 생각된다.
촛불이라고 하면 누군가를 추모하는 것 아닌가. 국가나 행정 등이 인권을 생각했다면 학생들을 배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할 게 아니라 즉각적으로 대응했을 것이다. 인권, 특히 아동이나 학생의 인권을 존중했으면 좋겠다.”
◆“가장 큰 아픔...위기관리 배워야”
대학 교직원 이상진(53)=“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인터넷 뉴스로 사고 소식을 처음 접했고 그날 퇴근 후 다음날까지도 계속 뉴스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는지, 우리나라 위기대응시스템이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생각에 너무 한심했다. 선진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다. 세월호 참사는 인생에서 가장 큰 아픔이었던 것 같다.
아이 넷을 키우는 아빠로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많은 학생들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제일 안타까웠다. 또다른 사람들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선생님들, 일반인들에게 감사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숨진 학생들의 부모에겐 얼마나 큰 트라우마로 남았을지. 모두가 잊지 말고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과 생활하다보니 위기관리시스템을 배워둬야 한다는 생각이 크다. 심폐소생술, 수영 등 위기 상황에서 잘 대처할 수 있는 준비와 기초질서를 잘 길러야 되겠다. 두 번 다시 어린 학생들의 희생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상규명 안돼 후유증...투표 잘해야”
주부 고명희(55)=“4년 전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아침,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학에 다니던 아이들을 위해 아침을 챙겨주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항상 아침뉴스를 틀어놓는데, 먼저 속보로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들은 것 같다. 오전 내내 구조현장 중계를 보면서 ‘큰 배니깐 어찌되든 몇 명 빼고는 다 구조되고 살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승객 대부분이 단원고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아이가 있는 부모 입장에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고, 일부 밖에 구조하지 못하고 수면위에 배가 보이지 않았을 때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4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아직도 세월호 사고의 밝혀지지 않은 진실로 후유증이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부모로서, 또한 기성세대로서 갖는 책임감과 미안한 마음이 크다. 승객들은 나와 같은 힘없는 국민이었고 사고가 난 이후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만큼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많은 시민들이 유가족의 고통과 아픔을 공감하며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연대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가 진실 앞으로 한걸음씩 다가가는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소위 ‘386세대’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대학시절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시절을 보냈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뤄낸 것을 직접 목격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세월호 사고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온 국민들의 힘을 모아 큰 변화를 이끌어낸 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80년대 그 시절의 모습과는 달랐지만, 아마 국민 마음은 똑같지 않았을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생각하는 것은 정말 ‘투표’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아끼는 사람을 대표로 뽑아야 할 것이다.”
◆“세월호 교훈 잊은 듯...각자 의무 다해야”
대학 교직원 하채수(56)=“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중 인터넷 기사를 통해 사고 소식을 접하고 ‘굉장히 큰 사고가 났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이어지는 속보 내용이 계속 달라 혼란스러웠고, 재난 보도 시스템이 제대로 안돼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국가 재난 대처 능력이 갈팡질팡하고, 근처에 해경·해군 등이 갔는데도 그렇게 침몰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는지 해군 장교 출신으로서 굉장히 의아하고 안타까웠다. 또 혼자 살기에 급급해 속옷 차림으로 탈출하는 선장을 보며 전체 선원들의 생명 구조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마음 아팠다.
세월호 참사는 선박에 대한 철저한 안전점검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고, 허술한 안전체계와 국민의 안전불감증이 팽배한 우리 사회의 실태를 확인한 계기였다. 세월호 이후 국가 차원의 안전관리 매뉴얼이 보강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최근 충북 제천 화재사건이라든지 경남 밀양 요양병원 화재 등 큰 사고가 이어지는 상황을 봤을 때 세월호의 의미와 교훈을 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국민이나 지도자 입장에서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 개인은 안전불감증을 극복하고 생명에 대한 고귀함과 나눔·봉사를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 일상화되면 좋겠다. 모든 관계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의무를 다하지 못해 큰 사고가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아이에 무릎 꿇은 날…박근혜 눈물 소름”
작가 전여옥(59)= “2012년 12월 19일 6시였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TV 화면을 가득 채운 출구조사 결과를 바라보았다. 머릿 속이 하얘졌다. ‘그녀가 대통령이 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놀라웠다. 무엇보다 기가 막혔다. 하늘도 무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 삼성동에 모인 박근혜 지지자들의 환호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도 앞날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박근혜와 3인의 비서 그리고 최태민일가가 이끌고 갈 것’이라는. 나는 이 나라가 걱정됐다. 이루기는 쉬워도 말아먹는 것은 한순간이므로. 2014년 4월 16일 아침이었다. 나는 전업주부가 돼 아이 밥을 차려줬다.
아들에게 그 아이 취향대로 고슬고슬한 밥을 지어주는 것으로 나는 만족했다. 평생 밖으로만 나돌았던 나였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서 ‘엄마~?!’하고 나를 찾게 된 것만으로도 내 삶은 가치가 있었다. 아이를 학교 보내고 한숨 돌렸다. 습관처럼 TV 뉴스를 틀었다. 화면에 커다란 배가 비쳤다. 순간 전직 기자의 감이 확 왔다. ‘큰 사건이 터졌구나!’ 배는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승객들은 구조됐다고 자막이 떴다. “그러면 그렇지, 저 큰 배가 저렇게 천천히 잠기는데 당연히 다 구조됐겠지.” 나는 TV를 껐다.
집안 청소를 했다. 뭔가 이상했다. 살다 보면, 나이가 들어가면 모든 것이 변함없이 돌아가는데 왠지 불안한 때가 있다. 가슴 한 켠에서 그 신호가 온다. 그 날도 그랬다. ‘뭔가 불길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친구들의 카톡이 주르르 떠 있었다. “세상에! 아이들이 그대로ㅠㅠ” “저 어린 것들 어떡해” “도대체 왜 구하질 못한 거야?” 다시 TV를 켰다. TV에서는 내 불길함이 현실이 돼 있었다.
그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진짜 아이들은 죽었다. 그것도 차가운 물에 잠겨서.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가슴이 먹먹했고 귓가에는 ‘엄마 살려줘’하는 아이들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물 한 모금도 마시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의 시스템’을 알고 있었다. 배가 잠기게 한 책임은 다툴 수 있지만 ‘구조의 책임’은 전적으로 나라의 몫이었다.
세금은 그래서 꾸역꾸역 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 자식의 안전을 지켜달라’는 절절하고 강력한 약속을 확인하며 내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다. 이건 나라가 아니다. 정부의 기능이 전혀 돌아가지 않는 것을 뜻했다. 나는 무서웠다. 정치인 박근혜까지는 괜찮지만 대통령 박근혜는 안된다고 그렇게 외쳤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1인 시위라도 해야 했나?’ 나는 내 가슴을 치며 자책했다. 저녁께 ‘그녀의 시스템’은 뒤늦게 가동됐다.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나 ‘아이들이 왜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발견 못했냐?’고 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시스템’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최순실과 비서관 세 명 그리고 아기 여신 ‘쿠마리’같은 정치인 박근혜의 실체가 유일한 ‘통치시스템’이었다.
그것이 바로 불행했던 세월호 비극의 단초였다. 한참 시간이 흘렀을 때 그녀는 TV에 또 나왔다. 눈물을 주르르 흘려가며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악어도 저렇게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 것이다. 베푸는 듯이 흘리는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역겨웠다.
나는 전에도 ‘그 인공눈물’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잊어서도 용서해서도 안 될 것들이 있다. 바로 결코 정상이 아닌, 무정한, 기이한 대통령을 뽑은 우리 자신의 치명적 실수였다. 그리고 아이들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듯 더럽다고 정치를 외면했던 우리가 치른 대가도. 세월호는 내게 무엇이었나. 엄마인 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정치를 했었다. 그런데 좋은 세상은커녕 ‘아이들’조차 지키지 못했다. 2014년 4월 16일. 그 날은 내가 얼마나 주제넘은 꿈을 꾸었는지를, 세상에 모든 아이들에게 울며 무릎 꿇은 날이었다.”
김건호·김용출·김지연·이동수·하정호 기자 scoop3126@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