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04-16 20:20:10
기사수정 2018-04-17 08:53:23
다섯 번째 시집 ‘옆 발자국’ 펴낸 조은 시인
“혼자 가는 것 같지는 않아요. 뭔지 모르지만 좋은 대상이 옆에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러면 예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대상이나 관념이 옆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옆 발자국이 되어주지요. 이게 무슨 자만인지 모르지만, 못 산 거 같지는 않아요.”
‘지난 혹한의 날씨에/ 굶주린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입에 물고/ 목숨을 걸고/ 그의 집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 새끼를 이사 갈 때 데리고 가지 못해 날마다 돌아와 찾으러 다니는 눈 위의 발자국이 시인의 눈에 밟혔다. 어느 날 ‘선명한 발자국을 따라가자/ 누가 막 놓고 간 물그릇에서/ 털장갑 같은 김이 오른다/ 작은 플라스틱 그릇엔/ 하트 별 보름달 모양의 사료’가 놓여 있었다. ‘거기서 작은 발자국은/ 맞은편에서 온 사람의 발자국과 만난다/ 둘은 나란히 간다’. 옆 발자국을 본 순간 시인은 그가 새끼 고양이를 찾았구나 확신했고, ‘발자국 옆 발자국’이라는 시로 썼다. 조은(58) 시인이 최근 펴낸 다섯 번째 시집 제목 ‘옆 발자국’(문학과지성사·사진) 사연이다.
시인은 서울 사직동에서 26년째 살고 있다. 부모로부터 독립한 뒤 처음 터를 잡은 사직동 언덕배기 작은 집에서 내내 살다가 재개발이 무산되면서 쫓겨나 지난해 11월 큰길가 아랫동네로 내려왔다. 그녀의 동반자였던 강아지 ‘또또’를 따라 골목골목은 물론 집들도 드나들어 뉘 집 방이 몇 개인지까지 환히 꿸 정도다. 그녀가 글 쓰는 사람이란 건 동네 사람들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잘 몰랐다고 했다. 웬 낯선 사람이 시인의 집에 있는 것을 보고 동네 주민 하나가 불쑥 들어와 “미쓰 조, 누구야?”라고 물었다. 낯선 이가 그녀를 인터뷰하는 중이라고 하자 “미쓰 조가 무슨 글을 써?”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할 정도로 그동안 잘 숨어 살았다. 그녀가 글 쓰는 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무람없이 집을 드나들도록 주민들이 허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했다.
‘친구가 내 집에다/ 어둠을 벗어두고 갔다/ 점등된 등불처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어둠이 따라붙지 못한 몸이/ 가뿐히 언덕을 넘어갔다// 사는 게 지옥이었다던/ 그녀의 어둠이 내 눈앞에서/ 뒤척인다 몸을 일으킨다/ 긴 팔을 활짝 편다/ 어둠이 두 팔로 나를 안는다/ 나는 몸에 닿는 어둠의/ 갈비뼈를 느낀다/ 어둠의 심장은 늑골 아래에서/ 내 몸이 오그라들도록/ 힘차게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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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직동을 떠나지 않고 낮은 자리 생명들과 더불어 시를 써온 조은 시인. 그는 “정신적 경제적 남루함에서 힘을 받던 젊은 시절을 거쳐 그것들이 발목을 잡는 시간들을 지나왔다”면서 “아직도 물살이 만만치 않은 내 앞의 강에다 또 하나의 디딤돌을 놓는다”고 시인의 말에 썼다. 허정호 선임기자 |
‘흐린 날의 귀가’에서처럼 그녀의 사직동 방에는 많은 이들이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 방에 오면 불면증인 이도 쉬 눈을 붙일 정도로 편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시인은 정작 성장기부터 우울한 어둠 속에 있었다. 그녀에게는 ‘허리로 차오르는 어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무들’이 보이고 ‘어둠의 지문 같은/ 그림자들’과 ‘무거운 삶의 뿌리까지/ 암흑까지’ 들어 올리는 어둠이 보인다. ‘어둠엔 삐죽삐죽한 가시가 돋아 있다/ 돌아누워도 돌아누워도 찔리고 긁힌다’. ‘그날의 어둠이 되밀려 온다/ 기억을 되살린 불빛이/ 조각조각 튀고/ 검은 빗물이 흐느끼며/ 젖은 치마 속 같은/ 그날의 길을 간다’. 명랑소녀였던 그녀는 집안사의 굴곡 속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우울증을 앓았다. 남들은 쏙쏙 성장할 시기에 거의 잠만 잤으니 생래적으로 어둠을 많이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어둠이라고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금테를 두른 어둠’도 있다.
“아직 남은 거 같기는 하지만 거의 홀로 극복했어요. 어둠이 완전히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딛고 살아야 할 구체적인 영역이랄까, 저에게는 에너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겠지만 제 어둠을 나름대로 사랑한답니다. 빛보다는 어둠에 모든 게 다 있는 거 같아요. 무엇을 꺼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저는 역량이 부족해서 한 주먹밖에 못 꺼내는 거죠.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어둠도 있다는 걸 체득하긴 합니다.”
4녀2남 집안에서 차별 없이 컸지만 낭만적인 아버지의 경제적 무능으로 섬약한 어머니의 고생을 보았다. 가여운 엄마가 자식들에게는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고 했다. 선하고 무르기만 해서 가족들을 고생시킨 아버지라는 남자상은 벽이었다. 아버지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인지는 모르되 연민의 대상에 쉬 ‘넘어가버리는’ 그녀이지만, 아직까지 남자에게는 넘어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3년 전 평소 바람대로 벽 하나 넘어 남동생이 있었는데도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서 두 손을 모으고 누워 조용히 이승을 떠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이별을 피했다’고 썼다. ‘그날은, 하루 종일 맑았다/ 느닷없이 마른하늘에 돌풍이 지나갈 때/ 그는 눈을 번쩍 뜨고/ 먼지 알갱이들이 황금빛으로 날고 있는/ 세상을 빤히 바라봤다/ 아슬아슬한 곳에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듯한 표정으로// 그는/ 강렬한 두 눈에 담긴 것을/ 시트 위에 내려놓았다/ 세상이 잿더미처럼 적막했다’. 원망했던 아버지와 이번 시집에서 시로 화해한 셈이다.
“타인의 삶, 특히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바라볼 때는 오래도록 그 행복이 정말 유지되면 좋겠다 싶은데 문득 생각하면 현실은 희한하잖아요. 저렇게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 어려움을 겪으면 얼마나 힘들까 미리 안쓰러워지는 거예요. 제 부정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행복을 느끼며 걸어가는데 앞날이 반드시 그러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할 수 있잖아요? 선한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힘들어요.”
그녀는 ‘아주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걱정 하나 없는 얼굴/ 꿈꾸는 눈빛으로/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여자는 턱을 조금 들고/ 태양을 안고/ 천천히 걸었다/ 우아하고 젊었다’고 ‘봄날의 눈사람’에 썼다. 따스한 봄날에 금방 녹아버릴 아슬아슬한 눈사람을 떠올리는 그녀는 일찍이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고 첫 시집에 썼다. 시인은 여전히 그 벼랑 끝 ‘작두날 같은 경계’에 서 있다. 1988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한 지 올해로 30년째이지만 아직까지 시로는 문학상 한 번 받은 적 없다. 동문도 없고 문단에 얼굴도 잘 내밀지 않은 이 사직동 ‘은자’는 벼랑 끝 경계야말로 사람의 본성이 가장 잘 보이는 영역이라고 했다.
“나는 오래/ 경계에서 살았다// 나는 가해자였고/ 피해자였고/ 살아간다고 믿었을 땐/ 죽어가고 있었고/ 죽었다고 느꼈을 땐/ 죽지도 못했다// 사막이었고 신기루였고/ 대못에 닿는 방전된 전류였다// 이명이 나를 숨쉬게 했다/ 환청이 나를 살렸다// 아직도/ 작두날 같은 경계에 있다”(‘빛에 닿은 어둠처럼’)
조용호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