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뜨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유희경

어떤 인칭이 나타날 때 그 순간을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어둠을 모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어떤 인칭은 눈빛부터 얼굴 손 무릎의 순서로 작은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드러나 내 앞에 서는 것인데 나는 순서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사실은 제멋대로 손 발 무릎과 같이 헐벗은 것들을 먼저 보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인칭이 성별과 이름을 갖게 될 때에 나는 또 어둠이 어떻게 얼마나 밀려났는지를 계산해보며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그 인칭의 무게로 생각한다 당신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당신을 듣는다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신작시집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문학과지성사)에서

◆ 유희경 시인 약력

△1980년 서울 출생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작란’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