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공화국 대한민국-상] 韓 재판 진행 속도 '5G급'…묻지마 소송 남발한다

 

검찰이나 법원 등 사법기관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는 갈등을 해결하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28일 대법원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법원에 접수된 소송사건(사법연감 기준)은 총 674만7513건이다. 같은 시기 인구가 5169만여명(통계청 기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국민 8명 중 1명이 소송을 제기한 것. 2015년 636만1785건 대비 약 6.06% 증가한 수치다.

이는 IMF 외환 위기로 대한민국 전역이 혼란스러웠던 1998년(698만7400건) 이후 역대 최고치다. 10년 전인 2007년 소송 접수 사건은 606만 3046건이었다. 이후 2013년 659만720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를 보이다 지난해 다시 큰 폭으로 상승했다.

민사사건은 모두 473만5443건이 접수, 전체 소송 사건의 70.2%를 차지했다. 소송 10건 중 7건은 개인간 분쟁이었다는 뜻이다. 형사사건은 171만4271건으로 전체 소송 사건의 25.4%를 차지했다.

소액사건을 제외한 민사본안사건 1심 28만6903건 중 가장 많았던 사건 종류는 건물 명도•철거 소송이다. 부동산 분쟁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총 3만5767건이 접수돼 전체 12.5%를 차지했다.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 갈등이 배경이 되는 이 사건 소송은 2015년에 이어 2년 연속 가장 많이 접수된 민사사건이 됐다.

'내가 입은 손해를 물어내라'는 청구 소송은 3만1780건(11.0%), '빌려 간 돈을 내놓으라'는 대여금 소송은 3만141건(10.5%)이 접수돼 뒤를 이었다.

법조계에서는 갈등 해결의 최후 수단이 돼야 할 소송이 갈등 해결의 출발점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대방을 압박하기 위한 고소·고발, 이에 따른 역고소 등이 이어지면서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 격화, 신뢰 상실 등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

소송 건수가 늘어나면서 검찰과 법원의 업무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이는 사실심을 강화함으로써 승복률을 높이고, 상소를 줄이겠다는 법원의 시도가 지속해서 추진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법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판 결과에 불복하고 다툼을 이어가는 경우는 증가했다. 지난해 항소심 접수 건수는 8만7487건, 상고심 접수건수는 2만5088건으로 각각 전년 대비 9.79%, 4.35% 증가했다.

◆소송하기 편한 나라, 대한민국

전문가들은 소송이 넘쳐나는 현상의 원인으로 우리나라가 비교적 소송하기 편한 나라라는 점을 꼽는다.

한국의 소송 편리성은 인구 1000만명 이상의 주요 국가들과의 비교 통계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세계은행이 최근 발표한 '기업환경평가 보고서(Doing business 2018)' 민사 사법제도 부문을 보면, 우리나라의 평균 재판 기간은 290일이다.

반면 독일은 499일, 영국 437일, 미국 420일, 프랑스 395일이다. 우리나라와 인접한 중국은 496일, 일본은 360일이다.

선진국에 비해서도 우리나라의 재판 진행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뿐만 아니라 비용, 편리성 면에서도 대한민국은 두드러진다. 우리나라의 '소가 비용 대비 소송비용' 비율은 12.7%다. 쉽게 말해 소송을 통해 얻은 이익의 약 10% 정도를 소송 비용으로 썼다는 뜻이다.

이는 영국(45.7%)의 3분의 1 수준이며, 미국(30.5%)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일본 23.4%, 프랑스 17.4%, 중국 16.2%, 독일 14.4%로 우리나라보다 높다.

물론 신속·저렴함은 소송 당사자 입장에선 보면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다. 실제 우리나라는 이 보고서에서 법적 분쟁(민사) 해결 부문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편리함으로 인한 서비스 수요의 양적 증가는 콘텐츠의 질적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자율적 조정능력, 자발적 해결가능성 상실한 우리 사회

그렇다면 연이은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이 가장 자주 법적 다툼을 벌이는 주제는 무엇일까.

상가 임대료 지급 능력이 떨어지는 자영업자와 원룸 월세를 내지 못하는 청년층을 상대로 가장 빈번하게 소송이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 때 임대료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진 사회 현상이 소송 실태에 투영된 것이라는 분석이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2016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5년 접수된 민사본안사건(1심 기준) 30만4319건(소송가액 54조5072억여원) 가운데 건물 명도·철거 소송이 3만4568건(11.4%)으로 가장 많았다. 최근 4년간 1위였던 대여금 소송(3만3458건·11.0%)을 앞질렀다.

건물 명도·철거 소송은 임대차 계약이 종료됐음에도 임차인이 부동산을 비워주지 못하고, 무단 점유할 때 대개 발생한다. 법조계는 이 소송의 증가를 결국 경제난으로 해석했다.

최근 늘어난 1인 가구 세대주인 청년들은 취업난으로 소득 능력이 낮은 실정이며, 이때 비교적 소액인 보증금은 쉽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전통적 가계부채 고위험군인 자영업자들도 고액의 월세를 납부하기 어려워하고, 자영업자의 60∼70%가 사업을 정리하는 악순환이 계속돼 이를 건물주들이 감당하지 못하면서 소송이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자율적 조정 능력이나 자발적 해결 가능성을 상실한 한국사회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이미 갈등은 일상화되었으며,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강도는 심각하며,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

이에 반해 갈등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역량은 매우 취약한 편이다. 여전히 '밀리면 죽는다' '할 테면 해보라'는 식의 구태적인 운동의 논리가 사회 전반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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