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쌓이고 쌓인 고된 삶의 흔적

남쪽 바다를 품은 섬 남해
“휴가 어디로 가?” “남해요.” “남해 어디?” “남해요! 섬 남해.”

동해의 푸른 바다, 서해의 다도해 그 중간에 있는 남해는 푸른 바다와 다도해를 모두 품고 있다.

거제, 통영, 여수, 강진 등 남쪽 바다를 품고 있어 어디를 가더라도 그 풍광에 빠져든다.

어디가 좋다 굳이 말할 필요 없을 만큼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좀 억울하다.

지명이라도 다르면 저마다 특징이 먼저 떠오르는데, 남쪽 바다를 뜻하는 남해와 한자마저 같으니 존재감이 크지 않다.

하지만 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 남해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경남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에는 물이 귀하고, 땅이 귀한 섬에서 억척스럽게 살았던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 좁고 비탈진 곳이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으면 터를 닦아 만든 논이 계단처럼 층층이 쌓여 있다.
봄이 한창인 이맘때 남해만의 매력을 느끼려면 망운산으로 향해야 한다. 어찌보면 처지가 남쪽 바다의 남해와 비슷할 듯싶다. 남해에서 가장 유명한 산은 보리암과 기암절벽이 있는 금산(해발 681m)이다. 금산의 유명세에 가린 망운산은 해발 786m로 남해에서 가장 높은 진산이다.

남해 망운산은 남해에서 가장 높은 진산이다. 철쭉이 지천에 깔려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이름처럼 정상에 서서 구름을 바라보는 산으로 정상에 서면 사방이 막힘 없이 트인다. 육지 쪽을 보면 지리산이, 바다를 보면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이런 풍광은 어느 때나 날만 좋으면 볼 수 있지만, 이맘때는 산등성이로 붉은 카펫이 깔린다. 정상 아래로 철쭉이 지천에 깔려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붉은 카펫이 푸른 남쪽 바다까지 이어진 풍광은 금산의 위세도 수그러들게 한다.

이맘때 접할 수 있는 망운산의 풍광을 보는 데는 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산 타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정상 북쪽에 있는 고찰, 화방사를 출발해 정상을 오른 뒤 철쭉 군락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산 타는 것이 버겁다면, 승용차로 임도를 타고 철쭉 군락 바로 아래까지 갈 수 있다. 이정표로 망운암(망운사)을 치면 된다. 다만, 임도가 좁은 구간에서 반대편 차량을 만나면 누군가는 폭이 넓은 지점까지 뒤로 물러나야 한다. 망운암까지 가지 않고, 간이 화장실이 있는 곳에 주차하면 바로 철쭉 군락이다. 초록잎이 나기 전 꽃이 피는 진달래와 달리 철쭉은 초록잎과 뒤섞여 화려함은 덜하다. 하지만, 주위가 모두 붉을 때보다 대비되는 초록잎과 함께 있어 존재가 더 크게 다가온다.

아래서 보면 나무데크 위 전망대가 정상처럼 보이는데, 전망대에 이르면 그 위로도 철쭉은 이어진다. 전망대까지만 올라도 바다 풍광을 즐기는 데 부족함은 없지만, 산길을 따라 좀더 올라도 그리 힘이 드는 코스가 아니다. 힘이 닿는 곳까지 오르면서 뒤돌아보면 그때마다 철쭉과 푸른 바다의 어우러진 장관을 마주하게 된다.

산을 오르면서 마주한 남해의 매력을 바다로 내려가면서 느끼려면 40여분 차로 해안길을 따라 가면 된다. 해안길을 따라가다 보면 군데군데 주차를 하고 바다 풍광을 바라보고 싶은 곳이 한둘이 아니다. 한껏 햇빛을 머금은 푸른 바다 위 은빛 물결에 한없이 빠져들게 된다.

은빛 물결을 따라가면 이르는 곳이 가천 다랭이마을이다. 물이 귀하고, 땅이 귀한 섬에서 억척스럽게 살았던 삶의 흔적이다. 좁고 비탈진 곳이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면 터를 닦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모아둘 곳이 없으니, 계단식으로 터를 닦아 빗물을 담았다. 이런 크고 작은 680여개의 논이 계단처럼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이다. 이맘때 계단식 논은 수확을 앞둔 마늘밭과 벼농사를 위해 물 댄 논이 뒤섞여 있다. 바다를 향해 뻗은 가파른 비탈에 조성된 계단식 논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가 따로 없다. 가파른 경사의 다랭이마을은 집, 논, 길 등이 산허리를 따라 구불거리며 바다로 이어진다.

다랭이마을은 수확을 앞둔 마늘밭과 벼농사를 위해 물 댄 논이 뒤섞여 있다.
쌓이고 쌓인 고된 삶의 흔적은 지금 살고 있는 이들에겐 일상이지만,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들에게 더 큰 감흥을 준다. 비탈진 길을 따라 마을 골목길로 내려가면 중앙에 길쭉하게 하늘로 우뚝 솟은 ‘숫바위’와 임산부 모습을 한 ‘암바위’가 보인다. 기도를 올리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암수바위다. 더 내려가면 바다까지 길이 이어진다. 그 아래에서 위를 바라다보면 까마득해보인다. 그냥 걸어 오르기도 힘들었을 산허리에 길을 내고, 논을 조성한 것이다. 계단식 논은 다랭이마을 말고도 남해 곳곳에 퍼져 있다.

다랭이마을처럼 규모가 크진 않지만, 30여분 떨어진 두모마을도 계단식 논이 발달해 있다. 여행객으로 북적거리는 것이 싫다면, 두모마을이 규모는 작지만 제격이다. 두모마을 앞의 섬은 노도로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다. 이곳에서 멈추지 말고 좀더 해안길을 따라 가면 유독 눈에 띄는 해변을 만난다. 상주은모래비치다. 자연스레 차에서 내려 해변을 걸으며 바다 풍경에 빠져들게 된다.

남해=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