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과거 합격 60주년 기념행사, 회방 / 조선시대 장수한 관원에게는 회갑, 회근, 회방 3대 경사 있어 / 그 중 회방 맞는건 최고의 영광 / 조선 전기 회방, 개인·가족 행사 / 후기에 국가적 경사로 제도화 / 선조, 송순에게 어사화·술 하사 / 숙종, 이광적에 쌀·비단 등 내려 / 정조, 강항에 어사화·홍패 주고 / "회방연 물건 ·비용 넉넉히 " 명해 / 좋은 제도 오늘날에도 적용되길
조선시대 장수한 관원에게는 일생 동안 60주년을 기념하는 회갑, 회근, 회방의 3대 경사가 있었다. 회갑은 지금처럼 만60세를 이르는 말이고, 회근은 부부가 혼인하여 60주년이 된 것으로 회혼이다. 그리고 회방은 과거시험에 합격한 지 60주년이 된 것을 의미한다. 회갑은 61세이고, 회근은 대부분 70~80대에 맞이했다. 회방은 20대 전후의 나이에 소과나 대과에 합격하는 것으로 볼 때, 80대 이상, 장수를 해야만 맞을 수 있었다. 회갑, 회근은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경사이지만, 회방은 국가에서 기념해 주었다. 이 때문에 회방을 맞는 사람에게 그 의미가 더욱 영광스러웠다.
조선후기의 학자 신대우는 ‘완구유집’에서 회방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사람의 상수(上壽)가 100세이고, 중수(中壽)가 80세이며, 하수(下壽)가 60세이니…생년이 61이 되어 회갑의 칭호가 있고, 혼년이 61이 되어 회근의 예를 베풀었으니, 인가에서 경사라 칭하는 것 중에 진실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 비록 그러하나 회갑은 하수에서 항상 있는 것이고, 회근은 중수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선비의 진신과 같은 것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만, 사람마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설령 얻더라도 60년이 지난 사람은 대개 또 상수에 많이 있으니 이 회방의 예는 노인을 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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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방례의 모습을 묘사한 평생도. 회방인이 궁에서 왕에게 어사화와 회방홍패를 받은 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행렬의 선두에는 왕에게 하사받은 화개와 회방홍패가 있으며, 안단과 무동이 뒤를 따르고 있다. 회방인은 화모를 쓰고 공복을 입고서 가마에 올라 있다. |
◆가족행사에서 국가행사로 발전한 회방
조선 전기에는 회방이 개인적이며 가족적인 행사로 기념되었다. 조선 후기로 가면 국왕의 전교가 내려지고 법전에 회방 관련 조항이 수록되어 국가적인 경사로 제도화되었다. 회방과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면앙집’에 수록된 송순(1493~1582)의 기록이다. 송순은 1519년(중종 14)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60년이 지난 1579년(선조 12)에 회방을 맞이하였다. 그해 10월, 집안 사람들은 송순의 회방연을 열었다. 선조는 그 소식을 듣고 호조에 명하여 어사화를 하사하고 술을 내려주었다. 이때 정철, 고경명, 기대승, 임제 등과 전라감사 및 각 읍의 수령 등이 송순의 회방연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1656년(효종 7) 별시 문과에 급제한 이광적은 60년이 지난 1716년(숙종 42)에 회방이 되었다. 당시 경기어사 민진후는 이광적의 회방에 대하여 조정에서 기념해 줄 것을 숙종에게 건의하였다. 민진후는 비록 회방의 규정이 법전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1579년(선조 12) 송순의 회방연 때에 조정에서 어사화를 하사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 것을 제안하였다. 숙종은 이를 받아들여 내자시에서 어사화를 만들어 주고, 쌀, 고기, 베, 비단을 내려 줄 것을 명했다. 이광적 회방의 사례를 계기로 조정에서 회방이 된 사람을 직접 챙겼다.
조선 후기에 회방은 점차 제도화되어 1786년(정조 10)에 중앙과 지방에서 회방인을 보고하는 방식, 회방인에게 내려주는 문서와 물품, 회방인에 대한 가자 규정 등이 마련되었다. 1786년 1월에 정조는 전교를 내려서 회방이 된 사람에게 특별히 한 자급을 올려줄 것을 명령하였다. 이후 회방은 19세기 후반까지 시행되어 1895년(고종 32) 2월에 회방이 된 장건규와 양기형을 각각 가선대부와 통정대부로 품계를 올린 것이 가장 늦은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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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용이 문과에 급제한 1802년에 발급된 홍패(왼쪽)와 1862년 회방례에서 받은 회방홍패(오른쪽). 가족행사이던 회방례를 국가에서 챙기면서 회방홍패가 지급되었다. 광명문화원 제공 |
◆“회방연에 드는 물건과 비용을 넉넉히 지급하라”
조선 후기에 조정에서 회방을 기념하는 과정은 1786년(정조 10) 정조의 전교가 내려진 후에 시행되었다.
먼저 한성부와 지방의 각 도에서는 회방을 맞이한 사람을 찾아서 보고하였다. 연초에 우선 관에서 조사하여 확인한 후, 서울과 각 도에서는 관찰사 관할 지역의 회방인을 보고하였다. 한성부와 각 도에서 회방인을 조정에 보고하면, 국왕은 회방인을 불러 만나보고, 회방인은 국왕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사은했다. 이때 국왕은 회방인에게 어사화를 내려 주었으며, 회방홍패나 회방백패를 내려 과거 급제의 기쁨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것은 1786년(정조 10)에 정조가 강항(1702~1787)의 회방을 기념하고 어사화와 회방홍패를 하사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항은 1726년(영조 2)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60년이 지난 1786년에 회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1월 26일에 정조는 강항이 거주하고 있는 경상도의 감사에게 회방연에 드는 물건과 비용을 넉넉하게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아울러 강항이 서울로 올라올 때에 연로의 지방관에게 일러 말을 지급하고, 이어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함께 강항을 창덕궁 선정전에서 직접 만나 어사화, 회방홍패, 어주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회방인이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에는 어사화와 회방홍패, 회방백패를 회방인의 집으로 보내주었다. 1796년(정조 20)에 평안도 덕천에 사는 정채룡은 회방이 되었지만, 노병으로 서울에 올라오지 못했다. 이에 정조는 정채룡의 어사화와 회방홍패를 평안도 덕천으로 보냈다. 제주 지역에 거주하는 회방인은 연로하여 바다를 건너 넘어오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조정에서 어사화와 회방홍패, 회방백패를 내려 보내고, 제주목사가 대신 전달하였다.
회방의 증명서인 회방홍패와 회방백패는 조정에서 회방을 기념할 때, 처음부터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회방이 시행된 초기에 국왕은 회방인에게는 어사화와 함께 회방연에 필요한 비용과 물품을 내려주긴 했지만, 회방홍패와 회방백패를 발행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 국왕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에게 합격증인 홍패와 백패를 내려주었다. 회방이 되었다는 것을 기념할 증명서를 과거 합격증으로 보내주기 시작한 것은 1786년(정조 10)에 회방인에게 한 자급을 올려주고, 어사화와 회방홍패, 회방백패를 내려주라고 명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회방홍패 3점과 회방백패 2점이 전해지고 있다.
◆국가 발전 기여한 원로에 감사해야
회방연은 과거에 합격하고 60년이 되어 회방을 맞이한 사람을 기념하고 축하해 주는 잔치다. 1579년(선조 12)에 송순의 회방연처럼 개인적으로 집안 사람들이 주도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과 해당 고을의 수령 등이 참석하여 거행하였다. 또한 1669년(현종 10)에 사마시 회방을 맞이한 이민구, 윤정지, 홍헌은 동기생과 함께 회방연을 거행하였다. 당시 회방연의 모습은 ‘기유사마방회도’라는 그림으로 남겼으며, 여기에는 회방연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인 좌목과 참석한 사람들이 지은 차운시 등을 수록하였다. 이후 회방연은 조정에서 잔치의 물품과 비용 등을 지원을 받아 거행하였다. 1716년(숙종 42)에 이광적의 회방연에서 숙종은 이광적에게 어사화와 함께 회방연에 필요한 쌀, 고기, 베, 비단 등을 내렸으며, 회방을 축하하는 어제시도 내렸다. 이광적의 회방연은 여러 차례 거행되었는데, 이 가운데 1716년 10월 22일에 장의동(현 서울시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이광적의 집에서 거행한 회방연의 모습은 겸재 정선이 그린 ‘북원수회도’에서 볼 수 있다. 그림과 함께 당시 회방연에 참석한 최방언, 한재형, 성지행 등을 수록한 좌목과 참석한 사람들이 지은 차운시 등을 담아 첩으로 만들었다.
회방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시대에 연장자를 우대하는 정책과 과거시험 제도가 결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 급제하여 국가에 기여하고, 그 공을 기념하는 회방 행사는 개인적인 가족의 경사로 출발하였으나 이후 국가에서 직접 기념하는 행사로 제도화되었다. 국가나 사회를 위해 평생을 바친 연장자에게 그의 공을 기리는 제도를 만들어 국가에서 직접 챙겼다는 것은, 흔한 노인 복지와는 다른 개념으로 다가온다. 산업화를 지나고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수고하며 살아온 21세기 어르신들에게 조선시대 회방 제도처럼 감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는 없을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노인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