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05-15 21:12:35
기사수정 2018-05-15 21:12:34
‘강렬한 색채’ 즐기는 사석원 화가 전시회
“무지개는 오래 볼 수 없어 더욱 아름답다. 색동 향연은 끝나고 덩그러니 남은 허공, 더 이상 가슴에 불을 쑤시지 않는다. 수평선에 태양이 눕고 내 청춘은 당나귀 타고 총총히 사라졌다.”
호방한 붓질과 강렬한 색채로 유명한 사석원(58) 작가의 요즘 심정이다. 얼마 전 뇌종양제거 수술을 하고 붓을 다시 들었을 때 그는 “과연 얼마나 나의 그림 그리기가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그 또한 세월과 함께 점점 쇠락해 가고 소멸돼 가는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새벽녘까지 술잔을 기울여도 끄떡없던 기운도 예전 같지 않다. 20대로 착각하면서 산 세월이 아니었던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5년째 산소호흡기로 연명하고 계신 아버지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영원히 청년처럼 살 것 같았던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는 것을 보니 연민이 몰려왔다. 가장의 무게를 온전히 견뎌야 했고 이제 와서 세월에 장사(壯士) 없음을 병석에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미래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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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창작의 에너지는 청춘이라고 말하는 사석원 작가. 그는 “젊음과 무지개는 오래 볼 수 없어 더욱 아름답다”고 말했다. |
연민이 느껴지는 눈빛을 가진 고릴라 그림은 가장의 무게를 투영하고 있다. 풍랑이 거센 바다에서 고릴라가 염소, 양, 토끼, 말을 껴안고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 옆에 떠 있는 배에서는 호랑이가 악어를 물고 있다. 고릴라의 깊은 눈빛에서 비장하면서도 절박한 애잔함이 느껴진다.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가장의 비애다.
“배 느낌을 주기 위해 인도네시아 폐자재를 수입해 액자 프레임으로 썼다. 동물들의 털만큼 가는 붓으로 어루만지듯이 섬세하게 그렸다. 나를 비롯한 가장들에 대한 위로라 할 수 있다.”
최근 그는 화려한 청춘을 빌려다 붓질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고 있다. 에너지가 넘쳤던 청춘시절 그의 표상이었던 호랑이, 부엉이, 소, 당나귀, 코뿔소 등을 새로운 기법으로 그렸다. 이전의 작업에선 캔버스에 바로 튜브물감을 짜 호방한 붓질로 작업을 했다. 화폭에 물감을 쏟아붓고 붓으로 형상을 그어가는 방식이다.
요즘은 동양화의 선염법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물로 번짐효과를 내는 대신 액자틀이나 골판지를 막대기 삼아 밀어내, 밑에 칠해진 색들이 번짐처럼 드러나는 방식이다. 그 위에 붓으로 선을 그려 형상을 만들어 간다. 결국 밀어내고(지우고) 덧칠하는 식이다.
형상 위주에서 색 구조체로 옮겨가고 있는 모습이다. 형상을 버리고 생명에너지를 색으로 포착해 내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가 빛이고 빛이 색이라는 점에서 보다 근원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밀어내고 지워도 흔적은 남게 마련이다. 그 위에 희망을 표현했다. 희망을 덧칠하다 보니 색감이 밝아졌다. 그동안 계속 뭔가 구축하고 하나라도 잡으려고 두껍게 그렸다면, 이번에는 덜어내고 싶었다. 이제 잡고 있는 것을 놓는 연습도 해야 할 때라는 걸 절감한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앞날이 암울했던 청춘시절에 동경한 호랑이, 사자, 부엉이, 소 등을 새롭게 그렸다. 힘의 상징인 태극권과 영춘권 자세를 부엉이와 호랑이 등에 부여했다.
“내세울 것 없던 시절 무협지와 권법 영화에 빠져들었다. 이소룡 같은 영웅 스타에 동경이 컸다. 무림의 제왕이 된 동물들로 형상화했다. 황소싸움에서 볼 수 있는 강인한 돌파력도 그림에 담았다.”
그는 동양화의 골법육필(骨法肉筆)로 기운 생동하는 입체감을 표현했다. 난관을 헤쳐 가는 청춘의 모습이다. 당나귀 등에 만발한 꽃은 청춘에 대한 선물이다. 젊은 시절 들끓었던 이성에 대한 욕망도 여성 누드화로 펼쳐냈다. 육감적인 여인들이 무지개와 호랑이, 닭 등과 어우러져 있다. 강렬한 원색과 거친 붓자국의 조합으로 표현된 관능적인 나부(裸婦)는 청춘시절 누구나 가졌을 법한 욕망을 환기시킨다. 욕망은 원초적인 힘, 야생성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누드를 동물들과 함께 원색으로 표현했다.
“성적 욕망으로 가득 찬 내 몸뚱아리, 불안과 불온, 허기와 갈증으로 가득한 청춘시절이었다. 밤마다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윤시내의 ‘열애’를 웅얼거리는 나이 스무살 청춘은 취했고 늘 숙취에 시달렸다.”
그는 그것이 청춘만이 지닌 고유한 아름다움이라 했다. 원색의 화면은 누구에게나 찰나적으로 지나가는 청춘을 환기시켜 주는 무지갯빛이다. 6월10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편완식 객원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