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나파밸리 뜨거운 햇살을 견딘 ‘자연 미인’ 소비뇽블랑

신선한 산도가 생명인 화이트 품종
케이머스 완숙된 포도로 풀냄새 줄여
‘나파밸리 스타일’ 소비뇽블랑 창조 

소비뇽블랑은 생선회 등 해산물과 잘 어울린다.
막자른 듯한 풀냄새와 레몬, 라임을 한입 베어 문 것처럼 침샘을 자극하는 산도. 피망, 아스파라거스 같은 풋풋한 야채향. 단 한 모금만 마셨을뿐인데도 마치 초여름 이른 아침 넓은 잔디 정원 한가운데 서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있으킵니다. 화장기 하나 없이도 빛나는 자연 미인처럼, 대자연을 그대로 한잔의 와인에 옮겨온 듯한 화이트 품종 소비뇽블랑입니다. 요즘같이 더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에 차갑게 칠링해서 생선회 등 해산물과 마시기 딱 좋은 와인이죠.

소비뇽블랑은 이것저것 ‘화장’을 덕지덕지 하지 않습니다. 맑고 순수한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품종이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오크 숙성은 거의 안하고 빵의 풍미를 넣기 위해 죽은 효모와 함께 숙성하는 쉬르리(Surlees)나, 뾰족한 산도를 둥글둥글하게 만드는 젖산발효(Malolatic Fermentation)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스틸 탱크에서 발효와 숙성을 모두 마칩니다. 젖은 돌 느낌의 미네랄이 풍부한 프랑스 루아르의 상세르(Sacerre)와 스모키한 미네랄이 돋보이는 루아르의 푸이퓌메(Pouilly Fume), 뉴질랜드 말보로, 아르헨티나 안데스 산맥 해발 1500m의 우코밸리 등이 대표적인 산지입니다. 비교적 서늘하면서도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 재배해야 소비뇽 블랑의 상징인 좋은 산도를 얻을 수 있답니다.
소비뇽블랑.
하지만 소비뇽 블랑의 산도를 잘 다스리지 않으면 너무 날카로운 느낌이 들고 제대로 익지 않는 경우 풀냄새가 강해 음식과 매칭하기 쉽지 않습니다. 소비뇽(sauvignon)의 어원이 야만적이라는 뜻의 ‘새비지(savage)’에서 왔다는 점은 이 품종이 얼마나 야생적인지 잘 말해줍니다. 뉴질랜드 말보르에서 생산되는 소비뇽 블랑이 가장 산도가 높기로 유명하죠. 이 때문에 일부 뉴질랜드 생산자들은 오크 숙성을 통해 이를 다스리기도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가 신대륙 와인의 상징이 된 것은 레드 품종 카베르 소비뇽 덕분입니다. 이 품종은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데 일조량이 풍부한 나파밸리는 최상급 카베르네 소비뇽을 얻을 수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녔습니다. 유럽은 수확기에 비가 오거나 서리가 내릴 수 있어 포도가 완전히 익을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모험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나파밸리는 수확시기가 끝날때까지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가 유지돼 당도가 높으면서 탄닌이 부드러운 카베르네 소비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케이머스 에멀로 나파밸리 소비뇽블랑.

1990년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을 대표하는 걸출한 스타 와이너리가 탄생했는데 바로 케이머스 빈야드(Caymus Vinyads)입니다. 특히 케이머스 나파 밸리 스페셜 셀렉션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올해의 와인 1위에 두번(1984, 1990 빈티지)이나 선정된 전세계에서 유일한 와인입니다. 요즘 케이머스가 다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데 나파밸리에서 거의 찾기 힘든 소비뇽 블랑 100% 와인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에멀로 나파밸리 소비뇽 블랑(Emmolo Napa Valley Sauvignon Blanc)입니다.
에멀로 와인을 빚는 와인메이커 제니 와그너. 출처=홈페이지

나파밸리에서는 주로 소비뇽 블랑의 강렬한 산도와 풀냄새를 줄이기 위해 산도가 낮고 아로마가 풍부한 세미용을 섞어서 프랑스 보르도 그라브·뻬싹레오냥 스타일로 만듭니다. 따라서 나파밸리에서 소비뇽 블랑으로만 빚는 화이트 와인은 매우 드물죠. 하지만 케이머스는 세미용을 섞지 않고도 풀 냄새를 줄이고 산도가 좋으면서 미네랄이 풍부한 이른바 ‘나파밸리 스타일’ 소비뇽 블랑을 선보였습니다. 침샘을 자극하는 감귤류의 시트러스에서 향긋한 멜론, 복숭아 등 핵과일 그리고 라벤더 등 꽃향까지 다양한 부케와 젖은 돌같은 세련된 미네랄이 돋보이는 와인입니다. 에멀로는 케이머스 오너이자 와인메이커 척 와그너(Chuck Wagner)의 딸 제니(Jenny)가 와인메이커로 빚고 있습니다.
한국을 찾은 케이머스 오너 겸 와인메이커 척 와그너.

나파밸리는 아주 더운 기후를 지녔는데 어떻게 산도 좋은 소비뇽 블랑 와인을 빚어냈을까요. 최근 한국을 찾은 척 와그너를 만나 케이머스 소비뇽 블랑의 탄생 배경을 들어봤습니다. 프랑스 알자스 출신의 이주민 와그너는 1906년 나파밸리의 러더포드(Rutherford)에 정착해 포도 재배 등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1972년 와인 양조에 재능을 보이던 찰리 와그너(Charlie Wagner)가 케이머스를 설립했습니다. 케이머스는 나라셀라가 수입합니다.

우선한 독특한 재배방법이 눈길을 끕니다. 잘 관리한 잎을 포도송이 위에 우산처럼 쓰워 나파밸리의 뜨거운 햇살에서 포도를 보호합니다. 특히 가지치기를 통해 포도송이를 듬성듬성 자라게 하는데 이렇게 재배하면 포도가 빨리 완숙해 강렬한 풀냄새를 줄이고 이른 수확으로 산도가 좋은 포도를 얻게 된다고합니다. 또 햇살 강도에 따라 포도밭의 잎 관리를 모두 다르게 하는 섬세한 재배도 돋보입니다.

“와인은 대자연과 사람이 함께 빚죠. 하지만 많은 이들이 떼루아라는 자연적인 혜택만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큽니다. 나파밸리의 태양은 매우 뜨겁지만 사람의 손으로 와인을 신선하게 만들수 있어요. 초목이나 풀냄새가 많이 나는 성분이 발현되지 않도록 하면서도 당도는 높게 만들 수 있답니다. 아침 햇빛을 많이 받는 동쪽의 포도밭과 저녁 햇살을 많이 받는 서쪽을 다르게 관리하는 것이 대표적이에요. 해가 질때는 햇볕이 강하기 때문에 서쪽를 바라보는 포도밭은 나뭇잎으로 ‘우산’을 씌워 신선함을 유지시켜주는 거죠. 케이머스의 화이트 와인은 신선하고 명확한 산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케이머스 에멀로 메를로.

반면 에멀로 메를로는 산도가 조금 낮도록 늦수확해서 충만하고 매끄러운 스타일로 만듭니다. 케이머스의 카베르네 소비뇽과 유사한 재배방식을 적용하는데 포도껍질이 약간 쭈글쭈글해질정도로 완전히 익을때까지 기다렸다 수확합니다. “메를로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소비뇽 블랑처럼 초목류향 날 수 있기 때문에 완숙시켜야해요. 포도 씨앗이 브라운 색이 될때까지 익히지 않으면 폴리페놀도 완숙되지 않아 와인도 자극적인 신맛을 지니게 된답니다 . 케이머스를 대표하는 카베르네 소비뇽 스타일을 메를로에 구현하려 했어요. 와인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포도나무는 평균 수령 15년으로 관리한답니다.” 에멀로의 포도밭은 산파블로베이 근처 핑크빛 자갈 토양으로 양분이 거의 없어 포도나무 뿌리가 양분을 찾아 땅 속 깊게 뻗어내려 갑니다. 덕분에 미네랄이 좋은 포도를 얻을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케이머스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케이머스의 카베르네 소비뇽은 굉장히 많은 팬들을 거느린 나파밸리는 대표하는 레드 와인중 하나입니다. 나파밸리 와이너리들은 1980년대 보르도 와인 스타일을 따라갔지만 케이머스는 보르도와는 확연히 다른 나파밸리 스타일을 고집합니다. 케이머스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은 보다 젊으면서 스모키한 느낌을 잘 살렸습니다. 다크체리, 블랙베리 등 검은 과일향이 풍부하고 다크 초콜릿, 스위트 타바코 등의 복합미가 느껴집니다. 스페셜 셀렉션은 뛰어난 농축미가 매력입니다. 응축된 블랙커런트, 모카, 검은체리, 검은자두향 직설적으로 느껴질도로 파워풀하고 탄닌이 매우 많지만 목넘김은 실크처럼 부드럽고 상당한 여운이 이어집니다.
케이머스 스페셜 셀렉션.

“케이머스 레드를 처음 만들때보다 당도가 높은 완숙한 포도로 만들기 때문에 알코올도수는 1% 높아졌지만 균형을 잘 맞춰 알코올은 튀지 않아요. 대신 스타일은 더 남성적이고 웅장해졌죠. 훨씬 더 오래 숙성이 가능하지만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은 6∼8년이 지났을때 가장 맛있고 스페셜은 10∼12년이 시음 적기랍니다. 모든 포도는 처음부터 스페셜 셀렉션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약 20% 정도만 스페셜 셀렉션으로 선택받게 됩니다. 비가 많이 온 해에도 케이머스는 품질의 기복이 적은데 이것이 바로 와인메이커 힘이죠”.

그는 ‘올드 바인 신화’를 믿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많은 생산자나 소비자가 올드바인에서는 뛰어난 포도가 생산된다고 맹신하는 경향이 큰데 사실 올드바인은 질병에 취약해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것이 그의 판단입니다. 따라서 케이머스는 15∼20년 주기로 포도나무를 다시 심어야 건강한 와인을 빚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양조철학입니다.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