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와 신생아 건강, 돌보지 않는 나라] 출산 장려만 열 올린 정부… 우울증 산모·아기는 ‘소리없는 비명’

사회 문제 부상한 산후우울증/“호르몬 변화 인한 일시적 증상 치부 안 돼”/ 어린 시절 학대 경험·부부 갈등 등 복합/ 방치 땐 극단 선택 등 비극적 사건 이어져/
우울증 겪는 엄마들 대부분 심적 고립/ 정부, 이제서야 상담센터 설립 추진
아동이 불평등을 경험하는 건 언제부터일까?

엄밀히 말하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떤 태아는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생각을 하는 엄마로부터 태담을 들으며 자라지만, 일부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엄마의 걱정과 한숨을 들으며 자란다. 그래도 원초적 시기의 생명일수록 외부 요인에 굴하지 않고 자라고, 그렇게 대부분 아이들이 건강하게 태어난다.

진짜 불평등이 시작되는 건 태어난 직후다. 수백만원짜리 유모차를 타느냐 아니냐가 영아 발달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물질적 풍요보다 생애 초기인 영유아의 신체·정서발달에 격차를 불러오는 건 부모의 양육태도다. 정서적 안정 여부가 아이의 심리상태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아동 발달의 위험요소 중 하나로 산후우울증을 꼽는다. 우울증이 심각한 산모는 아이와 적절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아이 특유의 의존성과 울음, 짜증 등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는 산후우울증을 호르몬 변화에 따른 일시적 증상으로 여긴다. 하지만 현장 전문가들은 단순히 호르몬 문제가 아니라 어린 시절 학대받았던 경험과 경제적 어려움, 부부갈등, 주변과 단절된 상황 등이 복합되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부모의 경제적 상황과 아이의 가정환경을 누군가 통째로 바꿔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 막 아이를 낳은 부모가 사랑으로 올바르게 양육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 정부가 나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된다. 요즘 아이를 제대로 기르는 방법을 모르는 젊은 부부가 많다. 주요 선진국들이 아동이 태어난 모든 가정에 간호사를 보내 건강을 살피고 부모교육을 실시하는 이유다.

‘서울아기 건강 첫걸음’ 사업에 참여 중인 박은영 사회복지사는 “오랜 기간 좌절과 어려움을 겪은 가정에 뒤늦게 개입해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정말 어렵다”면서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가정에는 새로운 창이 열린다. 새 창이 열린 가정은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문제가 꼬여 부모가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 전, 막 부모가 되었을 때 개입해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가정에서 살아갈 아이를 위해서다.

◆산후우울증 방치했다가는 문제 야기

산모라면 쉽게 우울증을 앓을 수 있다. 그냥 놔둔다고 해서 금방 낫지는 않는다. 자칫 우울증이 자녀에 대한 이상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출산 가정에 대한 전국 단위의 보편적 건강관리 서비스와 산후우울증 대책은 사실상 없다.

정부는 그동안 저출산을 국가적 위기로 보고 출산장려책 위주의 대책을 폈다. 하지만 매년 출생아 수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줄고 있다. 지난해 역대 최저인 1.05명의 합계출산율(여성이 가임기간인 15∼49세에 낳은 평균 자녀 수)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는 1.0명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정부도 출산장려책 위주의 저출산 대책이 실패했음을 사실상 인정한다. 태어난 아이들을 잘 기를 수 있도록 사회시스템을 개선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이 바뀌고 있다. 이제 걸음마 수준이어서 그런지 체계적이지 않다. 산후우울증만 하더라도 그동안 정부 관심권에서 거의 벗어나 있었다.

정부는 이제서야 산전·산후우울증 극복을 위한 중앙치료상담센터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출산율을 높이겠다면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출범시킨 지 13년 만이다. 복지부는 올해 1개의 중앙치료상담센터와 3개의 권역 센터를 설치할 계획이다.

손문금 복지부 출산정책과장은 “올해 처음으로 예산이 배정돼 산후우울증 관련 중앙치료상담센터를 설치하게 됐다”며 “시범사업을 실시한 뒤 센터를 늘릴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보건당국이 보건소를 찾는 산모에게 우울증 자가진단검사를 권하기는 한다. 고위험으로 나타나면 각 시·군·구에 설치된 정신건강복지센터로 안내한다. 하지만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조현병 등 중증 정신질환자의 이용률이 높은 데다 평균 7∼8명의 인력이 1인당 60∼70명을 관리하고 있다.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근무하는 한 사회복지사는 “우리 센터는 직원 1명당 대상자가 100명이 넘어 방문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양질의 관리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산모를 찾아가는 서비스가 절실

임산부 우울증을 전담하는 센터가 설치되더라도 시설 중심의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우울증이 심할수록 고립된 채 지내기 때문이다.

보건소 간호사들은 “각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모유수유 교실과 우울증 극복 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산모들은 그나마 자녀 양육에 관심이 많고 어느 정도 여건을 갖춘 사람들”이라며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가정 밖으로 불러내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가정을 찾아가는 서비스 체계는 매우 부실하다. 전국 보건소는 취약계층에 간호사를 보내주는 방문건강관리사업을 시행 중이나 보건소마다 간호사 10여명이 노인과 장애인, 만성질환자, 재가 암환자 등 여러 취약계층을 모두 맡고 있다. 간호사 1명이 맡는 대상자는 400∼500가구에 이른다.

이 사업에 참여 중인 한 지역 간호사는 “제가 담당하는 400가구의 90%가 노인”이라며 “하루에 8가구씩 방문하는데, 이 중 영유아 가구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양을 기준으로 실적을 평가하다 보니 경로당에 모여 있는 어르신 위주로 하게 된다”며 “대상자가 너무 많아 질 좋은 간호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는 한계가 많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지역의 간호사는 “복지부 지침에 따라 집중관리군을 대상으로 연이어 8차례 방문하지만 보통 2∼3개월에 한 번 들르는 식”이라며 “현재 맡고 있는 500가구 중 출산 가정은 다문화 가구뿐”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전북 전주시에서는 산후우울증을 앓던 한 30대 여성이 7개월 된 딸을 숨지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산후우울증 관련 비극적 소식은 매년 끊이지 않는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을 지낸 이봉주 서울대(사회복지학) 교수는 “위원회 활동을 할 때 모든 출산 가정에 건강관리와 부모 교육을 해주는 가정방문 서비스를 도입해야 한다고 계속 이야기했지만, 당장 출산율을 높이는 방안이 정책 우선순위를 차지했다”며 “자녀양육을 힘들어하는 이들을 방치하면 아동학대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재훈 서울여대(사회복지학) 교수도 “산모와 아이 건강보다 아이를 낳으라는 데 초점을 맞춘 기존 저출산 대책의 방향을 아직 바꾸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