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수 기자의 피로프! 피로프!] 러 삼엄한 통제에도 빛난 ‘태극전사 팬서비스’

보안요원 눈치에 마음 상한 팬 / 선수들, 흔쾌히 사인요청 응해 / 축제 즐길 수 있게 배려 돋보여
한쪽 뺨에 ‘태극기’ 페인팅을 하고 취재진과 팬들을 맞는 러시아인들이 있습니다. 수준급 영어 회화 실력과 더불어 친절한 길 안내는 기본입니다. 때로는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를 건네며 수줍어하기도 하죠. 신태용호 월드컵 베이스캠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로모노소프 스파르타크 훈련장의 자원봉사자(사진)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노상 웃는 낯 뒤에는 러시아 군부의 사나운 얼굴이 도사립니다. 훈련장 곳곳은 곤봉을 든 군인들이 장악했습니다. 한 자원봉사자에게 말을 걸자 “한국팀을 잘 모른다. 여기에 배치돼서 온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어 “규칙상 외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없어 미안하다”며 아쉬워합니다. 해당 ‘규칙’에 대해 묻자 대답 대신 슬쩍 한 곳을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위압적인 자세로 훈련장 내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훑어보는 군인들이 있습니다.

세계 축구팬이 모이는 ‘빅 이벤트’인 만큼 안전 문제도 중요하죠. 이곳은 군인과 러시아 경찰 50여명이 삼엄한 경계를 펼칩니다. 지난해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테러가 발생한 점도 경각심을 키웠습니다. 문제는 강압적인 통제만 있을 뿐 ‘소통’이 없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취재진은 물론 현지 팬들의 마음까지 상하고 말았습니다. 보안 요원들 대부분이 영어를 구사하지 못해 보디 랭귀지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개인 휴대전화까지 열어보는 철두철미한 보안 검색 앞에 통사정은 소용이 없습니다.

팬들 역시 마음이 불편한 건 매한가집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회의 교민들이 훈련장을 찾아 열띤 응원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팬 좌석까지 따라 온 보안 요원들이 선글라스 너머로 쏘아보는 통에 죄 지은 기분마저 든다고 합니다. 불만이 많은 건 한국팬만이 아닙니다. 15일(현지시간) 러시아가 사우디와의 개막전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러시아 11개 도시의 팬 공개 응원 장소인 팬 페스트(Fan-fest)를 경찰이 에워싸 ‘시위 현장’ 같은 모양새가 되면서 응원전의 열기가 팍 식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승리의 함성이 울리기는커녕 조용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팬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태극전사들이더군요. 에이스 손흥민(26·토트넘)은 훈련장을 한 바퀴 돌면서도 팬들을 바라봐 주는 ‘서비스’를 제대로 합니다. 훈련이 끝난 뒤에는 팬들의 사인요청 세례와 사진 촬영에 흔쾌히 응해주는 모습에 그제야 미소가 번집니다. 팬들의 안전이 물론 최우선이지만, 그들이 축제를 축제답게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안전’의 일부라는 점을 러시아 당국이 고려했으면 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안병수 기자 ra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