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용 경북도지사(76)는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해 야간대학 진학, 주경야독으로 고시 합격, 행정관료로 있다가 선거판에 뛰어들어 ‘6전6승’ 기록을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2014년 제6회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단체장 당선자 명단에 오른 인사는 그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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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용 경북도지사는 최근 경북 안동 경북도청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3년간 구미시장과 경북도지사를 하며 주민들과 어울려 웃고 울었던 지난날이 너무 행복했다”며 “퇴임 후 도민들이 자신들의 전화를 언제든지 받아 주는 도지사로 기억하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밝혔다. 김 지사가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경북도 제공 |
그의 말은 계속됐다. 김 지사는 “고시 출신이라는 엘리트 의식이 전혀 없었다. 모 국회의원은 ‘고시를 합격한 사람이 맞느냐’고 말할 정도였다”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렵게 성장한 내 분수를 늘 잊지 않으려고 했고 출마하면 당선되는 운(運)도 뒤따랐다”고 회상했다. 이어 “운은 덕(德)이 있어야 가능하고, 덕은 겸손에서 나온다”며 “겸손은 상대에게 져 주는 것이다. 이런 기조에서 살았고 거기서 답을 구했다”고 역설했다. 또 “나도 부족한 점이 많다. 잘못했으면 언제든지 잘못했다고 말하며 (주민들에게)용서를 구하는 보통사람”이라며 “도지사와 도민의 눈높이는 같아야 하며, 벽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측근이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지 않고 행사 분위기에 맞춘 즉석연설에 익숙하다. ‘행정의 달인’ ‘선거의 달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지사는 “어떤 이는 나를 정치인이라고 말하는데 정치인일 수도 있다”며 “그러나 정치기술자는 아니다. 정치기술에 능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선거에서 선출된 ‘목민관’이지 직업 정치인 출신이 아니다는 뜻이다.
김 지사는 “우리 관료사회가 격식과 고정관념의 틀에 너무 젖어 있다”며 “호두 껍데기처럼 단단한 격식과 관념을 망치로 깨부수지 않으면 창의가 나오지 않는다. 격식을 파괴하지 않는 한 혁신은 어려운 것”이라며 공직사회에 변화의 필요성을 주문하기도 했다.
구미시장 때 겪은 에피소드다. 구미공단 근로자들이 대화하는 도중에 ‘우리 노동자들이 골프를 칠 때까지 (시장이) 안 칠 수 있겠느냐’고 말해 그때부터 20년간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고 한다. 근로자와 약속을 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시민이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더라”며 “구미시장 재선 때는 무투표로 당선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도지사를 하며 보람된 일로 ‘도청 이전’을 꼽았다.
김 지사는 “전남, 경남, 충남이 오래전 도청을 이전했고, 경북이 마지막으로 남았는데 그동안 계속 미루어왔다”며 “주변에서는 (2006년 경북도지사 선거에서) 도청 이전을 공약하면 무조건 떨어진다며 만류했으나 사심 없이 추진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도청 이전 부지를 선정할 때 심사과정을 철저히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진행했고, 경북에 연고가 없는 60여명 대학교수들이 채점했다”며 “도의회 의원 60명 중 1명도 반대 없이 찬성했다”고 말했다. 또 “도청 신청사는 (주민의)접근성이 떨어지고 도시 인프라도 갖추지 않고, 도로 등을 건설해야하는 등 여러 가지 조건이 안 좋았는데 심사위원들이 최고 점수를 준 이유는 명당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그는 “도청 신청사를 구경하려는 도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관리과’를 신설했다”며 “이제는 관광명소로 유명해졌다”고 자랑했다. 이어 “도청 이전은 단순히 청사를 옮기는 차원을 넘어 경북의 정체성 재확립 의미를 갖고 있다”며 ”대구, 구미, 포항과 더불어 신도청을 중심으로 한 북부권이 추가된 힘찬 사륜구동이 완성됐다. 세종시와 함께 허리경제권을 형성해 한반도 균형발전의 새로운 성장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면서 경북도민의 ‘정체성’과 ‘얼’을 설명했다. 그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화랑정신,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호국충절, 독립운동의 고장으로 국난극복의 보루로서 의리와 뚝심, 정의감을 중시하는 굳건한 기상과 조국근대화와 역사 발전에 항상 앞장서 왔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바로 경북도민의 정체성이며 정신”이라고 설파했다. 이어 “경북도민의 얼 속에는 우리의 삶이 녹아있고 역사가 숨 쉬며 민족의 근원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며 “경북은 한국정신의 창”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경북도 신청사에 도민의 정체성과 혼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코리아 실크로드’도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프로젝트다.
김 지사는 “신라인들은 이미 1000년 전에 진취적 기상과 개방성을 앞세워 서라벌과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동로마, 이스탄불 등지를 왕래했다”며 “한국은 신라시대부터 문화발신국으로 문화수출국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됐다”고 피력했다. 이어 “육·해상 실크로드와 철의 실크로드를 통해 한국의 오랜 전통인 민족적 자존심과 문화융성 정신을 중국, 베트남,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등지를 탐방하며 전파했다”고 말했다.
경북농민사관학교도 그의 역점 사업 중 하나다.
그는 “농촌이 점점 피폐해지고 고령화되고 있다. 농민들을 재교육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2007년 경북농민사관학교 문을 열었다”며 “부자, 모녀가 1년간 같이 공부를 하고, 이들이 수료식에서 사각모자를 쓸 때는 정말 가슴 뿌듯했다. 수료생이 2만명”이라고 흐뭇해했다.
김 지사의 별명은 ‘미스터 새마을’이다. 그는 “새마을세계화재단을 설립해 해외 보급을 체계화하는 등 새마을운동 국제화를 위해 노력을 했다”며 “봉사단원과 함께 아시아·아프리카 15개국 48개 오지를 찾아다니며 새마을운동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 제고에도 앞장섰다”고 자평했다. 새마을운동은 정치적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는 “지방분권이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직을 떠나 아쉽다”고 토로했다. 23년간 지방자치를 실시했으면 시스템도 거기에 맞춰 정비하는 것이 옳다는 게 김 지사의 지론이다. 그는 “20년 이상 옷을 입었으면 이제는 갈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동안 자치분권을 강력히 주창했으나 정치논리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우리가 중앙정부로부터 은혜를 입어 시혜를 베풀어 달라는 차원에서 지방분권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지방이 갖고 있는 천부의 권한을 되찾아 오겠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지방 자치조직권, 자치재정권은 제도적으로 만들어야한다”며 “지방분권은 재임 중 못다 한 일로 나에겐 숙제로 남았다. 퇴임 후 계속 추진 할 것”이라고 의욕을 보였다.
퇴임 후 구상도 밝혔다. 그는 “내게 임무가 부여될 날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고 선출직을 할 군번은 아니다”며 “그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에너지화해 원로로서 희생과 봉사할 기회가 있으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내 몫이며 역할”이라고 말했다.
도청을 방문하는 대부분 인사는 그에게 말을 놓는다. 김 지사보다 일곱 살 아래인 사람도 ‘도백 잘 있는가’라고 편하게 대한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는 뜻이다.
같은 교사 출신인 김 지사 부인 김춘희씨는 많게는 1년에 450여 곳의 상가(喪家)를 방문하고 설거지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내조자다. 김 지사는 “아내는 자신이 죽으면 문상 때마다 입은 검정색 니트를 함께 묻어 달라고 했다. 눈물겨운 얘기인데…”라고 말한 뒤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지사는 2014년 KBC 광주방송과 KBC 문화재단이 수여하는 ‘KBC 목민자치대상’ 광역단체장상을 받았다. 부인 김씨는 김 지사를 대신해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목민자치대상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자동차로 이동하며 “일 중독에 빠진 남편을 그때서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김 지사는 목민자치대상 상금 1억원을 영호남 상생발전을 위한 종잣돈으로 사용해야 한다며 공익법인에 기탁했다.
김 지사는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아 늘 미안하다. 아들 둘 모두 한 번도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며 “집에서는 인기가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안동=황용호 선임기자 drag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