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근무' 빛과 그림자] 불필요한 보고·회의 간소화… 일의 총량부터 줄여라

4회-주 52시간 안착 어떻게 <끝> / 중복업무 제거 등 효율성 개선 / 장시간노동 기존 틀 변화 필요 / ‘시급×근로시간=임금’ 탈피 / 임금체계 총체적인 부분 개편 / 노사 양측서 교집합 모색해야 / 정부, 시행 초기 부작용 최소화 / 종합 분석 통한 지원·감시 중요
다음달부터 시행되는 주 52시간 상한의 근로시간 단축을 앞두고 산업현장 곳곳에서 아우성이다. 하지만 A(36)씨는 냉소적이기만 하다. 회사에서 섣부르게 관련 제도를 도입하면서 이미 쓴맛을 톡톡히 본 탓이다.

신제품 개발팀에서 일하는 A씨는 지난해 회사에서 ‘PC 오프제’를 도입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바뀌는지 내용을 들여다보면서 실망만 커졌다. 업무와 일터 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나 ‘효율적인 일터’ 등 미사여구만 그럴싸했다.

A씨 회사에서 PC 오프제 도입 후 일하는 장소만 직장에서 집으로 바뀌었다. 월말이나 연말 등 업무가 몰리거나 다음날 프레젠테이션이라도 잡히는 날이면 집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집으로 파일이나 각종 자료를 옮겨야 했다. 메신저를 통한 상사·동료의 연락, 각종 스트레스 등 업무로 인한 고통은 오히려 늘었다.

A씨는 “업무 총량이 줄기는커녕 작은 업무방식 하나 바뀌는 게 없었다”며 “물리적 시간만 줄인다고 해결될 일은 절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장시간 노동이 고착화한 일터에서 별다른 변화 없이 노동시간 ‘다이어트’를 꿈꾸는 건 폭식 식습관과 운동부족의 생활습관을 그대로 둔 채 체중감량과 건강한 신체를 꿈꾸는 것과 다름없다. 단순히 업무시간을 줄이는 것에 국한해서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업무 분장과 업무방식, 실적 평가, 인사, 임금체계 등 일터 전반에서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장기적 임금체계 개편도 고려해야

갑작스러운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해 경영계와 노동계 모두 충격에 휩싸였지만, 오래전부터 문제를 알면서도 방치했다고 볼 수 있다. 저출산 심화와 산업재해 증가, 청년 구직난 등 문제가 있는데도 경영계는 체질 개선보다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유지해 왔다. 노동계는 장시간 근로 여부와 관계없이 더 많은 임금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바로 현재의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주 52시간제 정착을 위해 정부가 신규 채용과 재직자 임금을 보전해 주는 향후 1∼3년 내 산업현장별로 최대한 돌파구를 찾을 것을 주문한다.

단기적으로는 불필요한 프레젠테이션과 보고를 줄이는 등 업무방식을 간소화하는 게 시급하다. 중복 업무를 줄이는 등 일터를 효율화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근본적으로는 ‘시급×근로시간=임금’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과 평가방식이나 인사 등을 총괄하는 임금체계의 총체적인 부분을 개선해야 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한 관계자는 “생산성 향상을 주된 목표로 해야 하는 만큼 시간 대신 생산성과 임금을 연동시킬 수 있는 직무·성과중심의 임금체계 개편이 장기적으로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과거 사례에서도 보듯 ‘효율적인 직무·성과 평가체계 도출’보다 ‘연공서열형 체계 탈피’에 초점을 둘 경우 노동계 반발만 키울 공산이 크다. 따라서 일터 혁신과 경영 효율화 등 노사 양측이 해법을 제시한 뒤 합의를 통해 교집합을 모색해야 한다. 산업별·기업별로 제각각인 근무여건이나 취업 규칙에 대해 정부나 국회가 일일이 중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인력충원과 교대제 개편, 노동조건 보장 등 근로시간 단축의 안착화 방안을 노사공동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노총은 근로시간 단축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일자리 연대협약 및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를 제안한 바 있다.

아울러 향후 4차 산업혁명 등 산업계에 찾아온 거대한 변화에 걸맞은 업무방식과 근로시간에 대한 고민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연착륙 위해 정부 감시·지원 중요

국가의 장래를 위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기는 하지만, 세계 최장 수준의 근로시간을 급격히 줄이는 것인 만큼 시행 초기 부작용을 줄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근로시간 단축 뒤 임금삭감에 대한 노동계 우려를 잠재우는 한편 300인 이상 사업장인데도 제도 시행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 상황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균형적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는 최근 경영계 요구를 수용해 근로시간 단축 시행을 눈앞에 두고 ‘기본 3개월추가 3개월’의 시정기간을 부여하기로 했다. 사실상 올해 말까지 6개월의 ‘유예기간’을 둔 것이다. 강력한 의지로 법 개정을 몰아붙인 정부의 고민이 컸음을 엿보게 한다.

이 기간에 허점을 보완하고 미진한 부분을 지원하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편법·탈법적인 부분을 강력히 단속할 필요가 있다. 준비가 잘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 업무를 하청업체에 전가하는 방식 등으로 새 제도에 대한 적응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일의 총량을 줄이지 않은 상태에서 근로시간을 줄이면 그만큼 업무량이 다른 어딘가로 전가한다”며 “하청·협력업체에 떠넘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2020년과 2021년에 근로시간 단축이 확대 적용될 때 혼란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3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해 실태조사를 벌였듯 2020년 1월 50∼299인 사업장 확대 적용을 앞두고 실태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300인 이상 사업장 조사에 그칠 게 아니라 다른 사업장에 대한 영향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의 연간 근로시간 변화를 살펴보면 2000년 2638시간에 달했다. 2004년 주 5일제(주 40시간) 도입을 거치면서 점차 줄었지만 2013년(연간 2247시간) 이후 2200시간대를 머물고 있다. 2004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인한 ‘약발’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다음달부터 주 52시간 상한이 적용되면 근로시간은 다시 눈에 띄게 감소세에 들어설 게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효과를 면밀히 관찰해 제때 대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고용노동부의 한 관계자는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저출산 극복, 국가경쟁력 향상 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근로시간 단축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며 제도 안착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