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세상보기] 가족이 난민이다

노후 자금 부족한 日 부모들/독립 실패한 자녀들 받아줘/질병·실직 땐 함께 파산 나락 /韓도 반면교사 삼아 대비를

야마다 마사히로 교수의 ‘가족 난민’, NHK 스페셜 제작팀의 ‘가족의 파산: 장수가 부른 공멸’. 최근 일본에서 출판된 가족 관련 책의 제목이다. 섬뜩하기까지 한 책 제목을 보자니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우려가 깊어만 간다.

 

야마다 교수는 일찍이 ‘파라사이트(기생적) 싱글’ 개념을 통해 비혼(非婚) 싱글시대의 개막을 예견한 바 있다. 기생적 싱글이란, 결혼 적령기에 이른 남녀가 결혼과 더불어 계층하강 이동을 하기보다는 부모에게 기생하면서 부모가 제공해주는 풍족한 생활수준을 누리며 자신의 월급으로 여유로운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기생적 싱글이 증가함에 따라 일본에서 결혼율과 출산율이 동반 하락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야마다 교수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제 일본 사회가 비혼시대를 지나 돌봄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정작 가족은 ‘난민’의 성격을 띠게 돼 누구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어느 곳에도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채 정처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가족이 예전처럼 개인을 위해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해준다거나 노인을 부양하는 돌봄 기능을 수행하리라는 기대 등은 불가능한 현실이 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야마다 교수의 예상은 NHK 스페셜 제작팀에 의해 적나라한 현실로 확인됐다. NHK가 처음에 주목했던 현상은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 고독사 문제였다. 그러나 취재를 진행해가는 동안 예상 외의 현상이 저널리스트의 감각에 의해 포착됐다. 노인 고독사 못지않게 가족이 함께 파산하는 비극적 현상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저속성장 시대를 거치는 동안 변변한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한 채 비정규직을 전전하던 자녀, 일상화된 구조조정의 와중에 갑작스러운 실직을 경험하게 된 자녀, 예기치 못한 이혼으로 자녀양육을 떠맡게 된 자녀가 고심 끝에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례가 꾸준히 늘고 있었던 것이다.

 

대개 연금생활자인 부모는 넉넉지 않은 연금으로 자신의 생계를 겨우 이어가는 상황임에도 자녀가 도움을 요청할 경우 기꺼이 자녀를 받아들이게 마련인데, 이로부터 불행의 싹이 시작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노부모와 독립에 실패한 자녀로 구성된 이들 ‘부머랭(Boomerang) 가족’의 경우, 부모가 심각한 질병에 걸린다거나 자녀가 돈벌이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경우, 가족이 함께 파산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비율이 결코 적지 않다는 데 고령사회 일본의 고민이 숨어 있다는 것이 ‘가족 파산’에 주목한 NHK의 문제의식이었다.

 

이 책을 한국에 번역 소개하면서 서두에 밝힌 취지 속엔, 오늘날 일본 가족이 경험하는 위기의 면면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은 만큼, 일본의 경험이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돼 줄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었다. 한국도 ‘기생적 싱글’ 현상과 1인 가구 비율이 급증하는 상황을 지나 머지않아 돌봄 시대로 진입할 것이 분명한데, 가족이 사회 안전망의 구실을 하기는커녕 난민이 돼 어느 곳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외면당할 것이 분명하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의 부모세대도 자신의 노후가 팍팍함에도 자녀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기에, ‘가족 파산’을 경험하리라는 것 또한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 모두 국가가 개인을 직접 돌봐주는 유럽식 모델보다는 기본적으로 가족이 돌봄의 책임을 지되 부족한 부분을 국가가 지원해주는 복지다원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부모가 성인 자녀와 함께 동거한다는 사실은 국가로부터 복지 혜택을 받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노부모 자신도 가족주의 가치관에 입각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한 채 마지막 순간까지 자녀를 돌봐주고 싶은 의지를 갖고 있다.

 

‘가족의 파산’에 등장하는 사례 중엔 병든 노모의 치료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동거 자녀가 있다는 사실이 방해가 되기에 자녀를 다시 분가 독립시켜야만 하는 눈물겨운 사연도 있고, 자녀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버는 쥐꼬리만 한 수입 때문에 부모가 국가의 복지 지원 대상에서 배제되는 사연도 있다. 그런가 하면 홀로 남은 병든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아들이 일을 포기하면 병원비가 모자라고 병원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늘리면 아버지를 돌볼 시간이 부족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연도 등장한다.

 

우리네의 경우 흥미롭게도 특별히 노인 부양만큼은 가족과 국가가 책임을 나누어지길 원하는 비율이 국가가 전담해줄 것을 원하는 비율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정서를 고려할 때 유럽식 모델보다는 일본식 모델로부터 얻는 교훈이 클 것 같다. 다만 가족과 국가가 노인 돌봄의 책임을 공유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가족이 난민의 지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가족 구성원이 동시에 파산하는 불행한 상황만큼은 피할 수 있도록, 가족의 선택지를 확대하는 방안도 절실히 요구된다. 가족 위기의 시대야말로 가족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고 되새겨볼 적시임은 물론일 것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