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지 않아 재앙이 된 플라스틱… 조류에서 돌파구 찾다 / 포스트 플라스틱 시대 주인공은
스탠드, 노트북, 마우스, 필통, 휴대전화, 휴대전화 케이스, 펜, 클리어파일.
지금 기사를 쓰고 있는 책상 위에 놓인 플라스틱 제품이다. 누군가 ‘오늘 하루 플라스틱 없이 살아보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당장 키보드를 두드릴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일을 못하니 ‘오늘은 휴가군’ 하고 기쁜 마음이 들지 모른다(단, 표정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내 휴대전화도 태블릿 PC도 만질 수 없다는 걸 알고 낙담할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냉장고, 세탁기, 화장실 변기, 마룻바닥, 합성섬유 의류 등 뭐 하나 플라스틱에서 자유로운 게 없으니 어쩌면 하루 종일 100% 면티를 입고 길거리에 가만히 서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우리는 ‘플라스틱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0년간 우리는 플라스틱의 편의성에 취해 환경 피해는 어느 정도 눈감아 줬다. 이제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프랑스는 2020년부터 플라스틱 컵과 접시, 비닐봉지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 영국은 빨대와 면봉 판매 금지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쓰레기 대란’을 계기로 2030년까지 플라스틱 폐기물 발생량을 50% 감축하기로 했다.
지금껏 우리가 사용한 석유 계열 플라스틱이 ‘플라스틱 사회 시즌1’을 이끌었다면, 이제 시즌2를 열 주인공을 찾아나설 단계다.
◆‘후기 플라스틱 시대’ 주인공은?
기존 플라스틱 문제는 화석연료에서 원료를 뽑아냄으로써 환경을 훼손하는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썩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무와 흙, 유리만 쓰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따라서 잘 안썩는 석유계 플라스틱의 대체재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게 ‘바이오 플라스틱’이다. 바이오 플라스틱은 식물에서 원료를 만들어낸다. 마트나 인터넷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옥수수 식기가 그 예다. 석유계 플라스틱도 몇 달 내 완전분해되면 바이오 플라스틱으로 구분한다. 플라스틱은 원료가 무엇이든 간에 ‘단량체로 중합체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레고에 빗대자면, 낱개의 레고블록(단량체)을 길게 연결(중합체)한 것이 플라스틱이다.
레고블록이 수백∼수천 조각 모이면 무궁무진하게 모양을 변형할 수 있듯, 중합체는 단량체 구성과 길이에 따라 변화무쌍한 속성을 갖는다. 우리가 수없이 다양한 플라스틱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그동안 플라스틱은 석유로 만든 단량체를 만들어 썼는데, 시즌 2에서는 각종 육상식물과 조류(해조류와 미세조류)가 단량체 원료로 떠오른다. 식물 등에 있는 당이나 지질을 이용하면 단량체를 만들 수 있다.
앞서 말한 옥수수 플라스틱은 바이오 플라스틱계의 ‘올드보이’ 즉, 1세대로 분류된다. 옥수수나 사탕수수는 당이 많아서 단량체 재료를 쉽게 뽑아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작물을 기를 때 만만찮은 환경파괴가 일어난다는 게 결정적인 약점이다. 화학비료와 살충제, 농기계 사용, 곡물 운반 과정에서 오염물질이 다량 배출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바이오플라스틱 기업인 노바몬트의 자체 환경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전분으로 1㎏짜리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석유량은 500g이나 된다.
미국 비영리단체인 미탄소등록(ACR)은 옥수수를 재배할 때 아산화질소가 다량 배출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아산화질소는 이산화탄소보다 310배나 강력한 온실가스다.
‘빈국에서 주식이기도 한 옥수수를 플라스틱 재료로 전용하는 게 옳은가’라는 윤리적 문제도 남는다.
2세대 바이오 플라스틱은 나무껍질로 만든다. 옥수수처럼 용도 전용에 따른 윤리적 문제가 없지만, 산림파괴나 토양침식 같은 문제가 뒤따른다.
3세대 바이오 플라스틱의 원료는 조류다. 당이나 지방산을 뽑아낼 수만 있다면 녹조·갈조류부터 미역, 다시마까지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골라 쓸 수 있다.
조류 지방산으로 단량체를 만드는 기술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 이화여대 박진병 교수(식품공학)팀이 보유하고 있다. 미세조류에서 지방산을 분리해 낸 뒤 전환 효소를 만드는 미생물과 지방산을 반응시키면 ‘중쇄카르복실산’이라고 하는 단량체가 만들어진다. 이렇게만 들으면 부침개 반죽을 만드는 것처럼 간단할 것 같지만 굉장히 복잡한 기술이다. 줄잡아 8∼9단계에 걸쳐 하이드록시기(OH)와 산소(O)를 지방산의 적절한 위치에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효소를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박 교수는 “(논문을 발표한) 2016년 이후 현재까지 단량체 생합성 공정의 생산성을 높이는 연구를 수행 중”이라며 “조류 플라스틱 상용화에 필요한 기술 수준이 100이라고 하면, 현재 50∼60에 와 있다”고 전했다.
조류 플라스틱 장점은 무궁무진하다.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기르는 데 품이 많이 들지 않는다. 옥수수를 기를 때처럼 비료를 뿌리거나 물을 공급할 필요도 없다. 조건만 맞으면 무서운 속도로 자란다. 매년 여름 4대강 보에 번지는 녹조만 봐도 그렇다.
미 IT(정보기술)전문지 와이어드에 따르면 전 세계 갈조류의 0.03%만 갖고도 기존 페트병을 대체할 수 있다. 땅에 묻어 4∼6주면 생분해되니 깔끔한 재료다. 다만 박 교수의 말처럼 상용화까지 가는 데 넘어야 할 기술적 장벽이 많다는 게 변수다.
생물이 아니라 온실가스로 플라스틱을 만들 수도 있다.
주정찬 한국화학연구원 박사는 “메탄이나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를 먹는 미생물도 있어 최근에는 이와 관련된 연구도 활발하다”며 “4세대 바이오플라스틱 원료는 온실가스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우리나라 국책사업, 12억원 날리고 중단
국제적으로는 이미 플라스틱 사회 시즌 2를 선도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포장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기업일수록 이 문제에 민감하다.
코카콜라는 2009년 페트(PET)병 원료의 30%를 식물에서 가져온 ‘플랜트 보틀’을 선보였다.
현재 코카콜라 음료 포장재에서 플랜트 보틀이 차지하는 비중은 북미에서만 30%, 전 세계적으로는 7% 정도 된다.
그런데 최근에는 페트병을 100% 식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다. 페트의 성분은 에틸렌글라이콜(EG)과 고순도 테레프탈산(PTA)으로 구성되는데 PTA를 생물로 합성하지 못했다. 코카콜라의 플랜트 보틀도 EG만 식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PTA 대신 생물에서 유래한 푸란디카르복시산(FDCA)을 써서 100% 바이오 플라스틱병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이 병은 페트가 아니라 페프(PEF)라 불린다.
주정찬 박사는 “페프는 페트의 장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스투과성이 낮아 탄산음료를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며 “물리적 성질은 페트보다 더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바이오플라스틱 연구는 선진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에 이어 세계 2위 해양 플라스틱 폐기물 배출 국가인 인도네시아도 조류 플라스틱 개발에 뛰어들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해양 플라스틱 폐기물을 2025년까지 70% 줄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해안선 길이가 5만5000㎞에 달하는 섬나라 이점을 살려 석유계 플라스틱을 대체할 조류 플라스틱을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2014년 산업통상자원부 국책사업으로 ‘바이오플라스틱 실증플랜트 국책 사업’을 시작했다. 대구시와 롯데케미칼, CJ제일제당이 대구 성서산업단지에 바이오플라스틱 플랜트를 지어 소재개발과 제품 상용화에 협력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지난해 8월부로 종결됐다.
대구시 관계자는 “공장 부지, 사업과제 등을 놓고 이견이 생긴 데다 사업 초반 배럴당 120달러에 육박하던 유가가 한때 40달러 밑으로 떨어지면서 ‘바이오 플라스틱의 경제성이 있겠나’라는 회의감이 번졌다”며 “특별위원회를 4차례나 꾸려 어떻게든 사업을 이어가려 했지만 종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첫 바이오화학분야 대규모 국책사업’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시작한 사업이 결국 플랜트 설계비 12억원만 날린 셈이다.
이 관계자는 “바이오 플라스틱을 개발해야 한다는 인식은 있지만, 당장 유가가 떨어지면 ‘굳이 지금 나서서 만들 필요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아쉽다”고 전했다.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