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08-28 10:00:00
기사수정 2018-08-27 21:36:50
〈1〉 콜리마 탐사이야기
콜리마대로는 러시아연방 사하공화국 수도 야쿠츠크에서 마가단에 이르는 2032㎞의 러시아연방 국도를 말한다. 사하공화국은 러시아연방을 구성하는 22개 민족 단위 공화국 중 하나다. 극동시베리아에 있는 사하공화국은 크기가 한국의 30배에 이르지만 살고 있는 사람은 100만명 밖에 안 된다. 사하인인 야쿠트인들이 주를 이루고, 러시아인과 퉁구스계 소수민족 에벤, 에벤키족들도 같이 살고 있다. 이 지역에 한때 영하 72도를 기록한 극한의 땅 오이먀콘이 있다. 콜리마대로는 사하공화국의 니즈니 베스탸흐, 한디가, 톰토르, 우스티-네라를 거쳐 마가단주의 수수만, 야고드노예, 팔랏카, 마가단으로 이어진다. 이 대로는 세계 5대강 중 하나인 레나강을 비롯하여 알단강, 인디기르카강, 콜리마강을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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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부터 5년간 진행된 콜리마대로 공사에 연인원 70여만명이 투입됐고, 2만7000명이 사망해 이 길을 ‘뼈 위의 도로’로 부르기도 한다. 도로 공사 중 죽은 사람들을 도로에 그대로 묻었다고 한다. |
콜리마대로는 소련 시절 스탈린에 의해 건설됐다. 이 공사엔 수백만명의 정치범들이 동원되고 희생됐다. 1940년부터 진행된 콜리마대로 공사에 연인원 70여만명이 투입됐고, 이 중 2만70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도로 공사 중 죽은 이들을 그대로 묻어, 지역민들은 이 도로를 ‘뼈 위의 도로’로 부른다. 지구상에서 가장 격리된 지역 중 하나인 마가단을 연결하는 도로를 조성하다 죽은 수많은 강제수용 노동자들이 이 도로 밑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소개된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로 알려진 이 지역을 방문해 역사의 현장을 확인해 보고자했다. 콜리마대로에 아로새겨진 스탈린 시대의 정치적 박해에 대한 기억의 문제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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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츠크에서 레나강을 배로 건넌 후 콜리마대로 탐사 출발 직전 강 기슭에서 기념촬영하는 탐사대원들. |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의 콜리마대로 학술탐사팀은 7월 24일부터 8월 3일까지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러시아 북동연방대와 공동으로 ‘뼈 위의 도로’를 자동차로 관통하면서 이 지역이 가진 역사적, 지리적 의미와 러시아연방 소수민족의 삶을 들여다봤다.
탐사 첫날 야쿠츠크에서 출발해 레나강을 건넜다. 자동차는 새벽 일찍 바지선을 타고 강 건너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우리 일행은 수상택시를 타고 건넜다. 레나강을 건너면 바로 니즈니 베스탸흐이다. 세계 최북단 철도역으로, 시베리아 북부의 물류기지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이 지역은 메기노-칸갈라스에 속한다. 영토가 남한만큼 크지만 인구는 3만명 조금 넘는다. 추랍차를 지나면 탓타다. 전형적인 야쿠트인 농촌지역이다. 너른 들판에는 말과 소가 방목하는 광경이 이어진다.
황량한 들판의 헛간 같은 집 옆에 우뚝 솟은 동상이 보였다. 사하공화국 최초의 여류학자 옥사나 나자렌카였다. 이 지역에서 유형 생활을 한 러시아인 정치범 야코프 스테파노프의 부인이다. 19세기 러시아 정치범들이 이 지역에 끼친 계몽적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기념비였다.
톰포의 중심지인 한디가에서 첫 밤을 보냈다. 깨끗한 민박집이었다. 한디가에는 석탄 광산이 있다. 이곳 군청에서 군수와 의회 의장을 만났다. 군수는 젊은 사람이었다. 70대로 보이는 의장은 자신만만하고 달변이었다. 의장에게 ‘소비에트 시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물었다. 러시아에서 현안이 되고 있는 빈부격차, 복지 혜택과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소하고 있는지 듣고 싶은 질문이었다. 결론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자유를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이먀콘은 극한 지역이다. 콜리마대로를 벗어나 150㎞ 떨어진 톰토르에 저녁 늦게 도착했다. 민박집에서 차려준 소박한 야쿠트식 저녁을 먹고, 사우나를 했다. 이런 벽지에서 사우나를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콜리마대로에서 톰토르 방향으로 100여㎞ 떨어진 곳에는 ‘죽음의 호수’라 불리는 호수가 있다. 콜리마대로 건설 중 희생된 시신들이 그대로 이 호수에 수장됐다. 그로부터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호수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콜리마대로 건설 중에 겪었을 정치범들의 희생에 숙연히 묵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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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단시 언덕의 ‘애도의 마스크’ 기념상, 사람 얼굴을 한 상징물은 마가단 집단노동수용소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
저녁 해질 무렵 오이먀콘의 중심지인 우스티-네라에 도착했다. 가는 길이 험하고 길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카페조차 없었다. 마침 인디기르카 강변에 공사판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비를 맞으며 컵라면과 빵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이 도시는 금광이 발견된 후 1937년에 만들어지고 1951년부터 군청 소재지가 되었다. 주민은 90% 이상이 백인이다. 호텔이라고 간판이 붙은 집을 찾아갔다. 민박집이었다. 한 방에 4명이 자야 하는 민박집이 유일한 호텔이었다. 저녁 식사는 근처에 있는 카페를 찾아야 했다. 일요일이었던 다음 날 아침 군청에서 부군수가 맞아주었다. 지역방송 여기자가 와서 인터뷰를 했다. 이 도시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이후 기술자들이 많이 떠나고 인구도 8000여명으로 줄었다.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이 눈에 보였다. 5년 전에는 인디기르카 강이 범람해 도시 전체가 침수되기도 했다고 한다.
체르키스 산맥을 넘어 마가단에 들어서자 기후와 식생의 변화가 눈에 띄었다. 산에 순록이 좋아하는 이끼들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순록들이 살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순록은 보이지 않았다. 더위로 더 북쪽 지역으로 올라간 탓도 있지만, 순록치기를 생업으로 삼던 에벤족이 순록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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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부총장, 러시아연구소 소장 |
마가단 수수만에서는 버려진 마을들이 눈에 띄었다. 수수만에서는 우연히 만난 지역 신문기자 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작은 아파트였다. 남편은 금광에서 일하느라 없었다.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애들은 두 집 합쳐 넷이 있었다. 급히 차려준 저녁이었지만 맛있게 먹고,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들에게 한국식 선물이라고 루블을 쥐여 주었다.
다음날 아침 야고드노예를 들렀다. 이곳엔 굴라크(강제수용소)에 관한 자료가 많은 곳으로 서방에 알려진 개인박물관이 있었다. 주인은 출타 중이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신 군청에서 자료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야고드노예에서 산길을 넘자 스텝과 같은 기후가 계속되었다. 멀리 산 위로는 얼음이 보였다.
팔랏카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미국의 소도시를 보는 듯했다. 이 도시는 분수의 거리로 알려졌다. 다양한 디자인의 분수들이 저녁 노을에 아름답게 물을 뿜고 있었다. 마가단 북부 지역에서 마주한 버려진 마을 풍경이 떠오르며 무엇이 사하공화국의 진짜 모습인지 혼란스러웠다. 팔랏카에서 마가단까지 100여㎞ 포장도로였다.
오후 10시가 넘어 마가단 시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 시간에 저녁을 먹을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토로 그릴이라는 레스토랑이었다. 청춘 남녀가 어울려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은 유명한 유럽 도시의 펍에 온 기분이 들게 했다. 식사비도 싸지 않았다. 마가단에 오기까지 느껴졌던 침울했던 분위기와 너무 달랐다. 마가단의 첫날은 우리 일행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가단에서의 둘째 날 시청 홍보 담당자들이 시내를 안내했다. ‘애도의 가면’이라는 충혼탑은 콜리마대로 건설 때 희생된 정치범들을 위로하고 기념하기 위해 1996년에 마가단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세워졌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가려져 있었던 역사였다. 마가단 역사박물관에는 콜리마대로 건설의 희생 장면들이 전시돼 있었다.
마지막 날 마가단 인근 올라 마을에 있는 에벤 박물관과 에벤어 학교를 방문했다. 에벤 문화와 에벤어를 지키기 위해 교사들이 애쓰고 있었다. 나가예프만 항구를 방문해 물류기지로서 마가단 항구 문제점도 살펴보았다. 인간이 뿌리내리기 힘든 극한의 땅 사하공화국에서 역사를 이루고, 삶을 영위해 온 이들의 모습을 소개한다.
강덕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부총장, 러시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