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대모의 팔순 자화상…윤석남 개인전

“누가 나에게 예술가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상으로부터 20㎝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20㎝ 정도만 떠 있어도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너무 높으면 자세히 볼 수 없고 현실 속에 파묻히면 좁게 볼 수밖에 없다.”

윤석남(79)이 1999년 국내 신문사에 기고했던 칼럼의 일부다. 그는 조금 떠서 현실을 명쾌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은유가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은유는 곧 예술의 본질이며 예술은 곧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윤석남은 그만의 여성에 대한 성찰로 쉬지 않고 변화해 왔다.

지난 40여년 동안 아시아 페미니즘의 대모로서 평등 사회를 위해 노력해온 작가 윤석남의 개인전이 오는 4일부터 10월14일까지 서울 종로구 학고재에서 열린다.

윤석남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40세, 불혹의 나이에 붓을 잡았다. 가사노동과 육아로 자신을 돌볼 여력이 없었던 그는 미술을 통해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시작했다. 마음이 치유됨을 느낀 그는 삶을 걸고 그림에 임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모델로 2년 동안 드로잉을 연습한 끝에, 1982년 문예진흥원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 1983년부터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공부했다. 비슷한 시기에 유학 생활을 하던 박이소 등 한국 작가들을 만나면서 동시대 뉴욕 화단에서 일어나는 페미니즘 미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설치미술의 새로운 국면들을 체화했다. 평면 작업에 답답함을 느끼던 작가의 작업 세계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는 극적인 체험이었다.

그는 귀국 후 나무를 이용하여 입체감 있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버려진 나무를 주워 그 위에 먹으로 여성을 새기고 색을 입혔다. 이러한 시도는 곧 설치 작품으로도 연결해 발전했다. 이를 토대로 윤석남은 1993년 금호미술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인 ‘어머니의 눈’을 열었다.

윤석남은 최근 자신을 초상화로 그려가며 자아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또 한국의 민화에 관심을 두고, 불화 전문가를 통해 채색화를 배우며 본격적으로 작업에 반영하고 있다.

그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이번 개인전이다.

작품 중 ‘자화상’(2017)은 민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책가도 앞에 자신이 앉아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군더더기 없이 순수하면서도 담대한 색이 돋보인다. 한지 위에 그린 ‘이매창’(2018)은 조선시대 기생 이매창을 그린 것이다. 이매창은 시와 노래에 능했으나 당대 성차별적인 사회 제도와 사상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다. 윤석남은 2003년부터 허난설헌, 나혜석, 김만덕 등 사회적 제약과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던 역사 속 여성을 주제로 작업해 왔다.

이번 개인전은 윤석남이 타인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 마주하고자 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던 그는 팔순을 앞두고, 정작 자기 자신은 작업 뒤에 서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여성 그 자체로 자신을 작업 속에 나타나려고 시도했고 그 시도를 전시 주제로 이번 전시를 처음 선보인다.

새로운 시도에서 현역 작가로서 윤석남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또 셀 수 없는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고 긴 시간 작품 활동을 해낸 윤석남의 모습에서 그가 작업했던 역사 속 여성들과의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

사진=학고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