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즉 '사회지도층의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떠올리게 하는 소식이 들려 왔다.
이날 미국 대통령 선거에도 나섰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자신의 모교인 해군사관학교 땅에 몸을 눕히는 것으로 81년의 세월을 마감했다.
재벌가 딸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라를 지킨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차녀 최민정(사진) 예비역 해군 중위가 아버지 회사가 아닌 중국회사에 취직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 노블리스 오블리주, 그 다양함
노블리스 오블리주 단어는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등장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던 1808년 프랑스 정치가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했다.
가진 자(재산, 학식, 지위)들이 앞장서야 국가와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리더십 개념도 들어 있다.
▲ 손흥민의 리더십
|
인도네시아 자와바랏주 보고르 치비농의 파칸사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베트남과의 준결승에서 황의조(왼쪽)가 득점에 성공하자 주장 손흥민이 같은 동작으로 세리머니를 펼치며 흥을 돋우고 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손흥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팀, 후배 도우미로 맹활약했다. 치비농=연합뉴스 |
손흥민(26·토트넘)은 백억대의 몸값을 자랑하는 세계적 스타이다.
물론 병역면제가 절실한 것도 사실이지만 월드컵을 뛴 몸으로 또 국가의 부름에 응했다.
2018아시안게임 축구대표팀이 23세 이하가 주축인 점을 들어 많은 이들은 "이번 아시안게임선 손흥민이 북치고 창구치고 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팀의 리더(주장)으로서 양보와 희생이라는 덕목을 완벽히 수행했다.
새까만 후배 이승우(20)가 급한 나머지 반말로 "비켜"하자 자신의 기회를 말없이 넘겨줬다. 후배 수비수가 쓰러지자 급히 수비수로 들어가 몸으로 떼웠다.
▲ 매케인 가문의 먼저 희생하고 혜택은 사양
존 매케인 상원의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미국 해군사상 최초로 나란히 별 넷을 단 '대장 부자'로 유명하다.
그 뒤를 이어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매케인은 해군 조종사로 베트남전 참전 중 1967년 10월 격추당해 포로로 잡혔다.
당시 그의 아버지 존 매케인 주니어는 해군대장으로 태평양해군 사령관이었다.
이를 안 월맹군이 아들을 석방시켜 주겠다며 제의했지만 매케인 주니어는 "다른 많은 미군들이 잡혀 있다"며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
5년 6개월의 포로생활끝에 1973년 3월 풀려난 매케인 중위를 당시 닉슨(왼쪽) 미국 대통령이 직접 격려하고 있다. 매케인 중위 아버지인 매케인 주니어 해군대장은 아들을 풀어주겠다는 월맹군의 제의를 "내 아들도 포로 중 한명이다"며 단칼에 거절했고 매케인 역시 뿌리쳤다. |
매케인 의원은 하노이 호아로 교도소에서 5년 반가량 수감됐다가 종전이 된 1973년 3월 14일 목발에 의지한 채 석방됐다.
이후 그는 진통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을 이라크와의 전쟁터에 주저 없이 보냈다.
▲ 희생을 자랑으로 삶는 전통
노블리스 오블리주하면 늘 등장하는 학교가 있다. 영국 최고 명문 사학인 이튼 스쿨이다.
졸업생 1/3가량이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하는 등 영국 지도층의 산실이다.
이런 이튼 스쿨이 명문대학 진학률 보다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다. 나라를 위해 전사한 재학생, 졸업생들이다.
이튼 스쿨은 제1차 세계대전 전사자 1157명, 2차 세계대전 전사장 748명의 이름을 학교 벽(사진)에 새겨 놓고 있다. 수석졸업생 이름이 새겨진 곳은 없다.
▲ 노블리스 오블리주, 역사에 대한 자부심
노블리스 오블리주 바탕에는 역사와 가문에 대한 자부심, 명예가 담겨 있다.
1차세계대전 때 영국 귀족 20%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일반 서민, 노동자층의 사망자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
2011년 당시 영국 왕위서열 1위인 찰스 황태자(왼쪽)가 아프간 파병을 앞둔 자신의 둘째 아들이자 왕위 계승 서열 3위 해리 웨일스 대위를 격려차 방문,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뉴시스 |
1982년 아르헨티나와 가까운 대서양의 포틀랜드 섬을 놓고 영국이 아르헨티니와 전쟁을 시작하자 당시 왕위 계승서열 2위 앤드류 왕자가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 출격명령을 100%수행했다.
앤드류 왕자의 조카인 해리 왕자도 헬리콥터 조종사로 아프가니스탄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를 장군으로 둔 142명의 미국 병사가 목숨을 내놓고 전쟁터에 뛰어 들었다. 그들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제임스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육군대장)은 아들 지미 밴 플리트 중위가 B29 폭격기를 타고 북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되자 "흔들림 없이 작전을 수행하라"며 아들의 수색을 못하게 했다.
필드 해리스 제1항공사단 사단장 아들 윌리엄 해리슨 중령도 장진호 전투에서 실종됐다.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의 외아들 윌리엄 클라스 소령은 부상입고 전역했지만 얼마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국전 때 우리의 적이었던 중국에도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있었다.
최고 권력자 모택동 주석의 아들 모안영이 한국전선에서 전사했다.
며느리가 남편의 시신을 중국에 안장하고 싶어했지만 모택동은 "많은 중국 군인들이 조선에 묻혀 있다, 내 아들도 그 곳에 그 들과 함께 있을 뿐이다"며 청을 뿌리쳤다. 모안영은 묘는 지금도 북한 평양에 있다.
▲ SK 가문 최민정 예비역 중위가 돋보이는 이유
최태원 SK 회장의 차녀 최민정(28)씨는 2014년 11월부터 2017년 11월까지 대한민국 해군장교로 복무했다.
|
해군 사관후보생 117기로 입대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차녀 최민정 후보생이 2014년 10월 권총 사격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해군 제공 |
재벌가 딸 중에선 사상 처음이자 아직까지 유일무이한 현역군인 생활을 했다. 전역 후 아버지 회사가 아닌 중국 투자회사를 찾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최민정 중위 사례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우리나라 지도층, 재벌들이 병역 의무를 남들만큼 다하지 못한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일반국민 병역 면제율은 6~7%선인 반면 재벌가 면제율은 30%가량 되고 어떤 가문은 60~70%선에 이르기도 한다.
재벌가 아들 병역 면제 사유는 질병, 외국 국적, 장기 유학, 과체중 등이다. 외국국적, 장기유학 등은 웬만한 국민들은 갖고 싶고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들이다.
이런 흐름속에 LG, 현대가는 특별한 잡음없이 일반인들고 똑같이 병역의무를 완수했다.
LG 3세들인 고(故) 구본무 회장을 비롯해 동생들인 구본능, 구본준, 구본식 모두 육군병장 만기제대했다. 4세인 구광모 회장도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의무를 수행했다.
현대가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 정몽준 아산재당 이사장 등은 모두 육군 병장 만기제대나 ROTC 장교로 복무했다.
▲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못박아 놓은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
스웨덴 최대은행 SEB, 건설장비 제조업체 아트라스콥코를 비롯해 일렉트로룩스, 에릭슨, 사브 등을 소유한 발렌베리가는 스웨덴 국부의 1/3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스웨덴 최고 재벌이다.
|
스웨덴 최고 재벌가인 발레베리 가문은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는 원칙과 함께 국가와 사회적 의무를 무엇보다 중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해군장교롤 반드시 복무해야만 사업에 참여할 문을 열어주고 있다. 사진=EBS 캡처 |
이런 발렌베리 가문은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생활을 해야만 가문의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주고 있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헌신, 어려움을 헤치는 능력, 리더십을 보이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런 가문의 전통에 걸맞게 그들은 영업이익의 85%를 기꺼이 법인세로 납부하고 있다. 남는 돈, 거의 대부분을 사회를 위해 내놓는 것이다.
◇ 노블리스 말라드 (지도층의 도덕적 타락), 깨알 검색하면 수두룩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대비되는 말이 노블리스(Noblesse Malade)이다. 말라드는 병든상태라는 뜻으로 지도층의 도덕적 타락을 말한다.
▲ 갑질, 다른 말로 하면 노블리스 말라드
최근 재벌, 사회지도층, 기득권층 갑질에 대한 비판여론이 드 높다.
|
한국 사회이 갑질은 노블리스 말라드, 즉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병든 상태를 그대로 그러낸 것이다. 사진=KBS 캡처 |
국정농단, 민간인 사찰, 땅콩회항, 물컵갑질, 막말, 미투 등이 이러한 예에 속한다. 이 모두 노블리스 말라드, 도덕의식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남의 이목을 최소한이라도 의식하지 않은 탓이다.
▲ 1%라도 나라보다 병역면제를 먼저 생각했다면 당신은 말라드(병들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
손흥민을 내세운 축구대표팀은 2018아시안게임 출발전 이런 저런 욕을 먹었지만 헌신하는 태도를 보였기에 찬사속에 귀국했다.
출발전 비슷한 논란으로 '제발 은메달을 따길 기도합니다'라는 엽기적인 응원까지 받았던 야구국가대표팀은 금메달을 따고도 찜찜한 기분을 안고 돌아 왔다.
동네 야구단 수준인 홍콩 투수의 아리랑볼(느려 터진 볼)에 맥을 추지 못해 "한국 프로스포츠 망신은 혼자 다 시킨다"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물론 그들도 나라, 한국 야구, 그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최선을 다했겠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것에서 진정성을 느끼기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 오블리주, 말라드는 결국 우리가 결정하고 만드는 것
한 나라의 도덕적 수준은 몇 몇 사람, 지도자 혹은 계층이 정하고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회 전체 의식이 합쳐져 결정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강권하진 못하지만 노블리스 말라드에 철퇴를 가하는 그런 움직임이 필요하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세계닷컴>세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