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죽인 채 황홀지경… 입맛대로 골라먹는 재미

눈도 입도 즐거운 ‘속초 나들이’
설악산 토왕성폭포는 비가 와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첩첩이 늘어선 바위 능선과 폭포 물줄기가 어우러진 풍광이 한 폭의 명화 그 자체다.
“죄송한데 목소리 조금만 낮춰주시면 안될까요. 조용히 감상 좀 하게요.”

주위의 소란이 아무래도 거슬렸나보다. 전망대 한쪽에 걸터앉아 있던 남성이 뒤를 돌아보더니 등산 얘기를 하던 한 무리의 일행에게 나직이 말을 건넨다. 5분 넘게 얘기를 주고받던 일행은 남성의 말에 입을 닫고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한다. 남성은 다시 고개를 돌려 멀찍이 떨어진 건너편 산으로 시야를 옮긴다. 전망대라고 해봤자 어른 10여명이 서면 북적일 정도의 너비다. 다른 사람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목소리 높은 이들에게 눈치 정도를 주지, 조용히 해줄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 남성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풍광을 오롯이 품고 싶었나보다. 자연이 만든 풍광을 본다기보다 미술관에서 유명 작가가 그린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표정이다. 제법 오랜 시간 앉아서 그 풍광을 지켜보고 있다. 가끔 물 한 모금만 넘길 뿐, 큰 움직임도 없다. 옆에서 들리는 소리가 작품에 빠져드는데 방해가 됐을 듯싶다. 묘하게 이런 분위기가 퍼져나간다.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이들 역시 별말 없이 전망대 한쪽에 앉아 숨을 돌리며 한 폭의 작품을 보듯 풍경을 감상한다. 국내 최장 길이의 설악산 토왕성폭포가 바로 이들이 감상하는 작품이다.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때를 맞춰 와야지만 마주할 수 있기에 더더욱 이때가 소중히 다가온다.
6개의 폭포와 연못으로 이루어진 육담폭포.

장마가 여름 초입뿐 아니라 여름 막바지와 가을 초입에도 등장한다. 토왕성폭포는 비가 와야지만 제대로 볼 수 있다. 비가 찔끔찔끔 내리면 안된다. 폭우가 쏟아져야 2∼3일간 그 위용을 드러낸다. 비가 많이 오는 무더운 여름이 토왕성폭포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최근의 ‘가을 장마’는 한결 선선한 날씨에 산행을 하면서 토왕성폭포를 만날 수 있게 한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무더위를 피해 그림 같은 풍광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마음의 공허함 달래주는 선계 풍경

강원 속초, 양양, 인제, 고성에 걸쳐 있는 설악산에서 토왕성폭포를 만나려면 속초로 가야 한다. 토왕성폭포를 갈 때 설악산국립공원에선 신흥사 입장료 3500원(성인 기준)을 내야 한다. 카드도 안 된다. 나름 친절(?)하게 입장권 판매소 옆에 은행 현금인출기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토왕성폭포로 가는 길이 아니라 토왕성폭포를 볼 수 있는 전망대 가는 길이다. 전망대 가는 길은 설악산 주요 등산로 중 힘이 덜 드는 코스 중 하나다. 공원 입구에서 2.8㎞ 거리에 있는 전망대까지는 1시간30분 정도면 도착한다. 전망대는 공원 입구 반달곰 동상을 지난 후 왼편으로 내려가야 한다. 신흥사는 공원 더 안쪽에 있다. 일부러 가지 않는 한 전망대 길에서 들를 일이 없다.

우거진 녹색 수풀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2㎞ 정도 걷는다. 악산 중 하나인 설악과 어울리지 않게 트레킹하듯 걷는 길이다. 그늘진 숲길에서 나오자마자 뻥 뚫린 하늘을 만나면서 그 아래로 우렁찬 물소리가 들린다. 6개의 폭포와 연못으로 이루어진 육담폭포다. 6개의 폭포가 확연히 구분되진 않지만, 폭포가 떨어지는 곳마다 작은 연못이 있다. 직하하는 폭포가 아니라 ‘S’자 형태로 꺾여 흘러내린다. 웅장하기보다는 수려하다. 폭포 양 옆의 절벽은 온전히 폭포의 모습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다. 폭포의 아름다움을 더 강조하는 역할을 해준다. 폭포 위로는 흔들다리가 놓여 있어 아래에서 봐도 아찔하다. 나무 계단을 올라 흔들다리 위에 서면 이 아찔함은 더해진다. 첫 발을 내디딜 때 흔들다리의 진동이 제법 강하게 다가온다. 이어 다른 이들이 걸을 때 전해지는 진동이 더해지고, 폭포 물줄기 소리까지 합해지면 다리를 건너려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진다.

육담폭포를 지나면 계단을 만난다. 앞으로 만날 계단의 예고편과 같다. 얼마 되지 않는 계단을 오른 뒤 400m 정도 가면 비룡폭포다. 육담폭포가 수려하다면 비룡폭포는 16m 위에서 직하해 웅장하다. 명칭에서 용이 연상된다. 폭포 아래 사는 용에게 처녀를 바치자 용이 승천했고 가뭄을 면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토왕성폭포 전망대까지는 불과 400m다. 전망대 가는 길의 실질적인 시작은 이곳부터라고 봐야 한다. 비룡폭포를 지난 후 만나는 900계단 끝에 전망대가 있다. 친절하게 맨 아래 계단에 숫자 ‘900’이 표기돼 있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며 이 숫자를 줄여 나가야 한다. 계단 50개를 오를 때마다 줄어든 숫자가 표기돼 있다. 중간중간 쉼터도 마련돼 있다. 힘들지만 점차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위안 삼아야 한다. 분명 험하진 않지만 힘이 드는 코스다. 그래도 산길을 타고 오르는 것보다는 덜 위험하다. 전망대는 2015년 12월에 개방됐다.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970년을 기준으로 45년 만에 개방한 코스다.

2015년 12월 이전 비룡폭포에서 토왕성폭포까지 가는 길은 낙석이 잦고 사고 위험이 커 출입이 통제됐다. 전망대가 조성되면서 먼발치에서라도 토왕성폭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토왕성폭포까지 가는 길은 겨울철 빙벽 훈련 장소로만 개방된다.

남은 계단 숫자가 ‘50’이 나올 때쯤이면 입이 바짝 마르고,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끌어올려 900계단을 마무리하고 전망대에 도착한다. 건너편 봉우리 위에서 산 아래까지 흰 물감을 붓질한 듯한 긴 물기둥이 눈에 들어온다. 화채봉에서 발원해 칠성봉을 끼고 돌아 노적봉 남쪽 토왕골로 떨어지는 총 320m(상단 150m, 중단 80m, 하단 90m) 높이의 토왕성폭포다. 국내 최대 길이의 폭포다. 토왕성폭포는 과거 토성왕이 성을 쌓았는데, 그곳에 천길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토왕성으로 이름 붙었다는 얘기와 오행설에서 흙기운인 ‘토기(土氣)’가 왕성하고, 기암괴봉이 폭포를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어 토왕성으로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폭포 발원지가 물을 많이 담지 못해 비가 많이 내려야만 폭포를 볼 수 있고, 이마저도 며칠 가지 못한다. 설악산이야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데, 거기에 길게 늘어진 흰 물줄기는 수려함의 화룡점정을 찍는 듯하다. ‘선녀의 옷고름이 풀어진 듯하다’, ‘용이 승천하는 듯하다’는 여러 미사여구가 머리를 스친다. 이런 미사여구보다는 그동안 선인들이 그렸던 한 폭의 수묵화가 떠오른다. 그 실체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폭포와 앞뒤를 둘러싼 여러 봉우리들이 어우러진 장관에 압도당한다. 하늘에 테두리만 그린다면 첩첩이 늘어선 바위 능선과 폭포 물줄기가 어우러진 풍광이 액자에 담긴 한 폭의 명화 그 자체다.

◆현실의 허기 채워주는 주전부리
관광객들로 붐비는 속초관광수산시장.

힘들게 올라 마주한 선계의 풍경을 보며 마음의 공허함을 달랬다면 현실의 세계로 내려와선 산행으로 인한 몸의 허기를 채워야한다. 그리 고민할 필요 없다. 속초관광수산시장으로 향하면 된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고르지 않을까 우려할 일도 없다. 다양한 입맛을 충족시킬 먹거리들이 널려있다. 대표는 닭강정이다. 바삭하게 튀긴 닭고기에 조청과 청양고추, 더덕 등 가게마다 자신의 방법으로 만든 소스를 버무린 닭강정을 판다. 식어도 맛있다. 시장에서 가장 유명한 닭강정 가게가 최근 위생상태 불량으로 과태료 처분을 받았지만, 여전히 여행객들은 긴 줄을 서고 있다. 이곳 말고도 번지르르 윤이 나는 닭강정이 허기진 배를 움켜쥔 여행객을 유혹한다. 닭강정으로 허기를 일부 채웠다면 담백한 오징어순대와 큼지막한 새우튀김, 수수부꾸미, 메밀전병 등으로 남은 공간을 채우면 된다. 식당을 가지 않고, 시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빈 속을 채울 수 있다. 목이 마르면 메론, 파인애플, 파파야, 복숭아 등으로 만든 스무디와 손바닥 만한 크기의 애플 수박이 있다. 주전부리로 배를 채운 뒤엔 여러 젓갈을 비롯해 가자미, 코다리, 가오리, 도루묵, 도치 등을 말린 생선 등 장 볼 거리도 넘쳐난다.

속초=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