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09-29 14:00:00
기사수정 2018-09-29 13:28:03
현대인 개성·과시욕 맞닿아 / 색다른 요리·음악·포즈 개발 / 소비·문화시장 새 트렌드로
“이거 한 번 먹어봐요. 솔직히 어때요?”
서울의 한 방송사PD 이정훈(29·가명)씨는 요즘 틈만 나면 지인을 집에 초대한다. 겉으로는 평범한 저녁식사 같지만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슬슬 본론(?)을 꺼낸다. “제가 만든 칵테일인데 한 번 맛 좀 봐보세요. 어때요. 조금 특이하죠? 주변에서 쉽게 보기 힘든 걸로만 만들었어요. 이 정도 맛이면 멀리서도 찾아올 것 같지 않나요?”
내년 3월 복합문화공간 창업을 목표로 하는 이씨는 이른바 ‘시그니처 메뉴’ 개발에 푹 빠져 있다. 시그니처 메뉴는 요즘 청년들 사이에서 ‘가게의 정체성이 담긴 메뉴’,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것’이란 뜻으로 쓰인다. 이씨의 시그니처 메뉴 중 가장 인기가 좋은 건 야생꽃으로 만든 증류주에 라즈베리로 담근 맥주를 일정 비율로 섞은 칵테일이다. “은은하게 감도는 과일향과 단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창업을 결심하고 지난 1년간 50종 넘는 유명 시그니처 칵테일을 직접 먹어보고 만든 결과물이란다.
이씨는 “비슷한 컨셉의 업체들이 많아 감성을 웬만큼 건드리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쉽지 않아 보이더라”며 “이런 포인트들을 잘 다뤄야 가게 전체의 ‘느낌’이 산다”고 말했다.
바야흐로 ‘취향’의 시대가 열린 것일까. 여기저기서 시그니처 바람이 거세다. 청년들은 이제 ‘시그니처’라 쓰고 속으로 ‘쿨한 것’이라고 읽는다. 이런 흐름을 타고 아예 제품명에 시그니처를 붙이는 경우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본래 의미를 넘어 ‘고급’ 혹은 ‘프리미엄’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현대인 특유의 구별짓기 욕망, 은밀한 과시욕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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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바리스타 이강빈씨가 만든 시그니처 메뉴인 ‘크리마트’는 SNS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강빈씨 제공 |
◆시그니처의 조건
시그니처(signature)의 사전적 의미는 서명, 혹은 특징이다. 흔히 유명인에게 “싸인해달라”고 할 때의 ‘싸인’(sign)이란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 각종 금융거래 계약서에서 보듯 서명은 ‘힘’이 있다. 그 안에 한 사람의 정체성이 오롯이 담겨 있어서다. 남의 서명을 아무리 비슷하게 따라 그려도 실제로 아무런 효력도 볼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서명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유일하기만 하면 모두 시그니처가 될 수 있을까. 28일 전문가들 의견을 종합하면 적어도 상업적 측면에서 시그니처라고 평가받기 위해선 일단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흔함’과 ‘절제’다. 독특함의 동의어처럼 쓰이는 시그니처와 사뭇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제대로 된 시그니처의 필수 조건이다.
우선 비슷한 것들이 많아야 한다. 흔할 수록 차이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아서는 안 된다. 미묘하게 달라야 한다. 감성을 건드리는 ‘독특함’이 언뜻언뜻 드러나야 더 끌린다. 즉 흔하지만 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현실은 어렵다. 시그니처 메뉴가 발에 치이지만 번듯한 성공 사례는 좀체 보기 힘든 이유다.
카페 업계가 정확하게 그렇다. 전국에 8만곳이 넘는 커피전문점이 들어서면서 방방곡곡 온갖 시그니처 메뉴가 등장했다. 시그니처 개발이 ‘생존 게임’이란 건 이제 업계에서 상식으로 통한다.
이른바 ‘라떼 아트’ 분야에서 장인으로 불리는 바리스타 이강빈(27)씨는 “시그니처 메뉴가 중요해진 것은 카페 업계가 이미 포화 상태가 됐기 때문”이라며 “(시그니처 메뉴는) 맛은 기본이고 컨셉과 비주얼, 제품명, 고객 반응까지 두루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아류작을 양산한 ‘스카치노’와 ‘크리마트’가 바로 그의 시그니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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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에서 카페를 운영 중인 문선희씨가 만든 시그니처 메뉴 ‘당근라떼’. 문선희씨 제공 |
올 여름 카페를 차린 대구의 나형규(33)씨도, 경산의 문선희(27·여)씨도 가장 오래 고민한 것이 시그니처였다. 고심 끝에 나씨는 아보카도를, 문씨는 당근을 커피에 빠뜨렸다. 우려와 달리 반응이 좋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을 타더니 주변 지역에서도 찾아올 정도가 됐다. 문씨는 “일단 ‘당근과 커피’의 조합 자체가 이색적이어서 사람들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하다”며 “‘퀵으로 보내달라’거나 ‘차로 몇 시간 걸려서 왔다’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여기서 두 번째 조건인 ‘절제’가 중요해진다. “이게 내 시그니처”라고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상대방이 인정해줘야 ‘진짜’가 된다. 아보카도를 커피에 접목시킨 나씨가 메뉴 개발에 쏟은 시간은 6개월.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면서도 대중의 입맛을 잡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보카도가 익숙하지 않은 분들한테까지 ‘맛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시그니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중문화 평론가 정덕현씨는 “독자성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느끼기에 ‘쓸모 있는 범위’에서 만들어져야 수긍이 된다”며 “독특함만 너무 강조하면 소비자에게 이질적 느낌을 줄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당연히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결과적으로 시그니처라는 건 공급자뿐만 아니라 수용자가 함께 만드는 개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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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에서 카페를 운영 중인 나형규씨가 개발한 시그니처 메뉴 ‘아보카도 에그폼 커피’. 나형규씨 제공 |
◆시그니처의 사회학
대중음악계나 체육계도 시그니처 바람이 거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시그니처 사운드(sound)’다. 노래 맨 처음 부분에 자기만의 독특한 소리를 넣는 것으로 가수 박진영의 ‘JYP!’나 프로듀서 용감한형제의 ‘브래이브 사운드∼’, 그레이의 ‘그레이∼’ 등이 대표적이다. 자신이 만든 음악에 말 그대로 서명을 하는 셈이다. 해외 유명 음악인들 대부분이 자기만의 시그니처 사운드를 가지고 있다. 쿨(cool)하고 핫(hot)한 뮤지션의 바로미터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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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무리 투수 크레이그 킴브럴은 실력에 더해 투구 전 특유의 시그니처 포즈로 인기를 끌었다. |
운동선수의 경우 특정 선수가 즐겨 사용하거나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 기술을 ‘시그니처 무브(move)’라고 부른다. 종합이종격투기대회(UFC) 선수 정찬성(31)은 그라운드 기술 ‘트위스터’가,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양학선(26)은 ‘양(YANG)1’과 ‘양2’가 시그니처 무브다. 정적인 종목으로 평가되는 프로야구에서도 흔히 나타나는데 미국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무리 투수 크레이그 킴브렐(30)이나 일본인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45)도 독특한 준비 동작으로 인기를 모았다.
최근 SNS에서는 ‘시그니처 포즈’란 말도 흔히 쓰이고 있다. 원래 모델들이 자주 취하는 특정 동작들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젊은 세대들이 저마다 재기발랄한 포즈를 만든 뒤 ‘이것이 내 시그니처 포즈’라고 공언하고 서로 공유하며 즐기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시그니처 포즈’란 해쉬태그를 검색해보면 사람들이 올린 각양각색의 포즈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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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언맨’ 등 히어로물 주인공들은 저마다 특유의 시그니처 포즈를 가지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
이런 모습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는 소비와 취향이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의 것’, ‘나만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남보다 내가 더 낫다’는 믿음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SNS에 범람하는 각종 시그니처들이 본래 뜻대로 일종의 구분선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소비재든 대중문화든 대중들이 각종 시그니처에 주목하는 것은 자신의 문화적 취향을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심리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며 “특히 SNS가 발달하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해졌는데 여기에는 지인들의 관심이나 주목 등 ‘돌아오는 것’에 대한 기대 심리가 숨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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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업체 발렌타인사는 2015년부터 프리미엄 위스키인 ‘발렌타인 21년 시그니처 오크 시리즈’를 내놓고 있다. |
남과 다른 것이 곧 ‘프리미엄’으로 여겨지면서 최근 시그니처 단어를 제품명에 넣는 트렌드도 두드러지고 있다. 유명 수입양주 브랜드를 비롯해 각종 식음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초고가 가전제품들에 시그니처라고 이름을 붙인 한 업체 관계자는 “남과 다른 것, 회사가 가장 주력하는 제품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중립적인 의미인 시그니처가 왜 ‘고급’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는지 그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기호와 취향, 소비를 통해 타인과 자신 사이에 끊임 없이 ‘구별짓기’를 하려는 현대인의 욕망이 잘 드러난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