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세상보기] ‘비혈연 친족’의 시대가 오고 있다

‘부계 혈연’ 친족관계 지각변동/ 주변 지인과 더 의지하고 신뢰/ 책임·의무 없어 부담없는 만남/ 남성도 새로운 관계망 시도를

최근 조카로부터 들었던 실화다. 소개팅에서 만난 후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결심한 커플이 마침내 양가 부모 상견례를 하게 되었단다. ‘상견례 후 프러포즈’라는 요즘 시대 결혼 공식에 따라 부모 허락받고 결혼식 날짜를 잡으려던 커플, 상견례 자리에서 남자 쪽 아버지와 여자 쪽 아버지가 6촌 사이임이 밝혀지는 바람에 혼비백산했다는 것이다. 번화한 친족 사이에 왕래가 빈번했던 시절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던 셈이다.

 

올 추석에도 민족의 대이동이 이어지긴 했지만, 동시에 연휴를 이용한 해외여행객 숫자가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뉴스가 들려왔고, 부모의 역귀성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명절 증후군이 며느리는 물론이요 시어머니와 아들에게도 전염되기 시작했다는 기사에, 시댁과 친정 중 어느 곳을 먼저 가야 할지를 놓고 미묘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확실한 것은 부계혈연 중심의 가부장적 친족관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무엇보다 왕래하는 친족의 범위가 눈에 띄게 협소해지고 있음이 분명하고, 만남의 빈도도 확연히 줄어들었음은 물론, 무조건 순응해야 했던 ‘시댁 우선’의 규범 또한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친가 외가 아가씨 도련님 등 친족 명칭에 내포된 불평등 요소를 시정하자는 목소리도 힘을 받고 있다.

 

와중에 일련의 ‘fictive kin’이 친족관계가 주를 이루었던 자리를 서서히 채워가고 있는 듯하다. 영어 단어를 굳이 번역하자면 가상의 친족 혹은 상상의 친족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보다는 비혈연 친족이 보다 쉽게 와 닿는 것 같다. 여기서 비혈연 친족이라 함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친족 사이에 주고받던 경제적 교환에서부터 집안 대소사 품앗이를 거쳐 정서적 친밀감에 이르기까지 남부럽지 않은 끈끈함을 오랜 기간 유지해온 관계를 의미한다.

 

지난달 해외 패키지 여행길에서도 비혈연 친족이라 불러 마땅할 이들을 만났다. 6명이 함께 어울려온 팀이 있었는데, 여고 동창이라 하기엔 나이 차이가 있는 듯했고, 그렇다고 자매나 시누올케 사이도 아닌 것 같았다. 궁금해서 어떤 사이인지 물었더니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학부모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당시 9살 개구쟁이들이 어느덧 27살이 됐다니 올해로 18년째 만남이 지속돼온 셈이다. 그중 가장 맏언니가 올해 예순, 막내가 쉰으로 열 살 차이가 나는 데다 6인 6색 다양한 개성도 눈에 띄었다. 자녀를 매개로 한 학부모 모임이야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만남이 20년 가까이 이어지는 경우라면 친족이라 불러 손색이 없을 관계가 아니겠는지 싶다.

 

그러고 보니 골목을 사이에 두고 한동네에 살았던 이웃사촌이 각자 살던 동네를 떠나 뿔뿔이 흩어진 후에도 지금까지 계속 만남을 지속하는 경우도 보았고, 같은 직장을 다니는 워킹맘이 양육 품앗이도 하고 아이들 교육에 관한 실속있는 정보도 주고받으며 친자매 못지않게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모임도 보았다.

 

남남으로 만났음에도 비교적 오랜 기간 친족 같은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비혈연 친족은 의무와 책임으로 엮인 기존 친족과 달리 자발적으로 선택한 관계로서 무거운 책임이나 불필요한 의무에서 자유롭게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더불어 동창 모임은 동년배를 중심으로 하지만 비혈연 친족은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인생의 선배가 후배를 위로해주고 후배는 선배를 따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대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던 점도 미덕으로 꼽혔다.

 

친족관계를 주제로 한 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어느 사회든 친족 관계를 활성화하고 유대를 공고히 하는 친족 키퍼 역할을 하는 이들이 존재하는데,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것이다. 현대사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혈연 친족관계도 여성들 사이의 유대에서 주로 관찰되는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남성 또한 비혈연 친족관계를 시도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성의 사회적 관계망은 학교 동창생 이외에는 일터에서 만난 관계가 대부분인데, 이 관계는 일을 떠나면 눈에 띄게 약화하기 마련이다. 고령사회를 지나 초고령사회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삶의 질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가 사회적 관계망임을 고려할 때,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혈연·학연·지연을 대신할 새로운 관계망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집안 어른 중 73세로 지금도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분이 계시다. 말씀인즉 그동안 친구를 많이 사귀었지만 같은 나이 또래 동창만 만나느라 젊은 후배를 사귀는 데 소홀했던 것이 큰 후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 나이 되고 보니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도 있고, 건강이 나빠져 은둔하기 시작한 친구도 있는 데다, 대부분은 현역에서 은퇴해 돈벌이하는 친구가 손에 꼽을 정도가 된 관계로 한 달에 한두 번 모임도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친족의 의미가 전반적으로 약화하고 있는 와중에, 혈연관계에 얽매이지 않고도 친족이 담당했던 순기능을 수행할 ‘비혈연 친족’의 아름다운 사례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더욱 다양해지고 보다 활성화할 수 있길 희망해본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