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8-12-03 23:13:38
기사수정 2018-12-03 23:13:38
기계인간도 인간 진화 연장선상에 / 신을 대체한 ‘과학의 신’ 맹위 떨쳐 / 물질숭배 찌든 현대인 오만 버리고 /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신인간 돼야
인간의 힘(능력)은 이제 우주를 정복할 정도로 막강하게 됐다. 최근 소식에 따르면 화성의 내부를 탐사할 정도로 천체물리학은 발전했고(화성탐사선 인사이트호), 핵융합기술로 인공태양을 만드는 기술도 가시화하고 있다고 한다. 공상과학(SF)영화에 나오는, 지구가 멸망할 경우 다른 별에 옮겨 사는 인간의 이야기가 단지 공상만은 아닌 것 같다. 이를 두고 인간신(人間神)을 거론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신의 의미도 ‘창조주’로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 신’이라는 개념으로 의미변전하고 있다.
인간개체를 두고 보더라도 기계인간, 사이보그의 시대를 점치는 것은 이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인류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기계인간을 인간의 진화의 연장선상에 두고 있을 정도이다. 인간이 현대에서 이룩한 과학적 성취는 놀랄 만하다. 의학과 첨단기술의 융합은 인간의 평균수명을 100세, 150세, 그 이상도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 실정이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로 통하는 인간은 이제 수많은 기술과 도구에 휩싸여 있다. 신을 부르거나 기도하기도 전에 고도의 물질문명은 그것을 해결해주고 만다. 신을 대체한 과학의 신은 지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어쩌면 현대인은 기계인간이 출현할 것을 예상하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갈 심리적·철학적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계인간의 등장은 신체적 존재인 인간에게 어떤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 기계인간은 인간신의 절정이고, 물신숭배(物神崇拜)의 극치이다.
인류학의 초창기에 서양의 인류학자들은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원주민(선주민)을 현장조사하면서 그들을 ‘물신숭배자’라고 명명했다. 아마도 스스로 고도의 정신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유럽인은 이들 지역의 여러 인종의 생활을 보면서 자연을 물신(物神)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미개인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도리어 신물(神物)숭배자였다.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현대인이야말로 물신숭배자가 아닐까.
물질만능의 현대인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좌우익을 막론하고 과학기술에 의존해 사는 유물론자 혹은 과학기술숭배자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할 때만 해도 무슨 ‘큰 철학적 선언’이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 정도로 순진했던 것 같다. 현대인은 신이 죽었다고 해도 놀라지도 않고 “신이 언제 있었던가”라고 눈만 멀뚱거리고 있을 정도이다. 현대인은 신 자체를 잃어버렸다.
과학기술을 향유하지 않는 현대인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과연 현대인이 행복한가라고 물으면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된다. 현대과학기술문명은 평행적으로 정신신경질환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인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약간씩 정신신경심리치료(상담)를 요하고 있는 것 같다. 현대인의 특징은 스스로 심신의 균형을 이룩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인간의 영혼은 마음(心)을 물질(物)에 너무 빼앗겨서도 안 되고, 물질적 도구와의 긴장관계 속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 심신의 균형을 유지해야 행복한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고 있다. 물질문명의 구조가 현대인을 그렇게 만든 지 오래다. 평균수명은 늘어나는데 생활은 불안에 쫓기고 있다면 이것은 이율배반이다. 물질은 풍부한데 정신이 궁핍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최근 인류학의 경향은 흔히 원시미개사회라고 통칭돼왔던 선주민 사회의 삶의 행복한 모습,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에 대해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근대의 분기점을 흔히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둔다. 여기에는 인간만이 생각한다는 저의가 숨어있다. 과연 인간만이 생각하는 것일까. 생각은 인간의 전유물일까. 헤겔은 절대정신(이성)의 간지(奸智)를 주장했지만, 인류학은 자연 스스로가 그러한 ‘간지’를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은 이것을 ‘신의 예정조화설’과 통하는 것으로 볼지 모르겠다.
캐나다 출신의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은 “숲은 생각한다”라는 책을 냈다. 부제로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라고 했다. 코스타리카에서 아마존 숲속생활상을 기록한 민족지를 내놓은 그는 인간중심의 인식론적 견해를 넘어서 문명과 야생 사이의 소통이 가능한가를 물었다. 그는 언어가 없는 숲의 생물도 생각하고 세상을 표상하며 그들만의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한다. 재규어에서부터 개미핥기, 대벌레와 솔개, 선인장과 고무나무에 이르기까지 숲속생물의 흥미진진한 삶과 생존전략이 인간의 역사와 얽히고설키는 풍경을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낸다.
숲이 생각한다는 발상은 매우 샤머니즘적이다. 자연이나 사람을 이용(대상)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현대인을 크게 깨우쳐주면서 인간존재의 행복이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물신(物神)숭배에 찌든 현대인은 자연을 ‘신물(神物)’로 보는 새로운 존재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인간은 문명적 오만을 떨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신인간(神人間)이 돼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신을 버리면 결국 인간이 인간을 버리는 것이 된다.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신은 회복돼야 한다. 신은 판단명석하게 전모를 밝힐 수 없는 신비로서 존재 그 자체이다. 인간도 사물도 마찬가지이다. 신인간은 본래 존재(자연)와 통하고, 인간신은 물질문명과 통한다. 신인간이야말로 심신의 균형을 이루는 미래인간의 희망이다.
박정진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