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조선, 서구열강 중 최초로 美와 수교/다른 해외 공사관과 달리 건물 매입/고종의 대미 외교 비중 가늠할 근거/日帝에 강제로 팔린 아픈 역사 간직
2012년 10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이 대한민국 품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한국 병탄으로 1910년 강제 매각되고 102년 만이었다. 문화재청이 매입한 공사관은 2013년 1월부터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관리·위탁이 위임됐고, 5년여 ‘원형 복원 및 전시 조성 사업’을 거쳐 올해 5월 22일 미국 워싱턴 DC 로건서클에서 개관식을 열었다. 마침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던 문재인 대통령도 참석해 “자주외교와 한·미 우호의 상징,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날은 1882년 한국과 미국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지 136주년 되는 바로 그날이었다.
필자는 2013년부터 공사관 원형 복원 및 개관 준비 관련 업무를 전담해 왔다. 이 글을 통해 5년여간 진행한 공사관 복원을 위해 국내·외 관련 자료를 보다 충실하게 조사·수집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굴한 몇 가지 사례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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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3년 7월에 발행된 미국의 ‘데모레스트 패밀리 매거진’에 실린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의 내·외부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은 원형 복원에 크게 참고가 되었다. |
◆“미국 정부와 국민에 우의를 밝히고자 한다”
1882년 5월 22일, 조선은 서구 열강과는 처음으로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듬해 미국은 정동에 미국공사관을 개설하였으나, 조선은 중국의 압력과 재정적인 이유로 1888년 1월에서야 초대공사 박정양 등 공관원 11명을 파견해 공사관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업무를 개시했다. 건물 이름은 ‘피서옥’(皮瑞屋). 하지만 박정양은 미국 파견 허락조건으로 중국이 요구한 ‘영약삼단(?約三端: 외교상 속국으로서 지켜야 할 세 가지 단서)’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결국 소환됐고, 서기관 이하영을 서리공사로 임명한 뒤 귀국길에 올랐다. 이하영 임명 후, 3개월이 되지 않은 1889년 2월 13일에 피서옥에서 현재 건물로 옮겼다.
2013년 당시까지 학계에서는 공사관의 개설·운영 시점을 매매등기를 완료한 1891년 12월 1일을 기준으로 삼아왔으나,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 소장 ‘미국무부문서’(1889년 2월15일) 등을 확인한 결과 현 공사관 건물은 1889년 2월 13일부터 최초로 임차하여 사용했다. 1891년 초부터는 당시 사용하던 건물을 매입하기 위한 협상을 벌이는데,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건물 매입 이유는 “상주 공관의 필요성과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우의를 밝히기 위함”이라는 두 가지였다.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기 전후에 일본, 중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주요 열강에 각 공사관을 개설, 운영했으나 워싱턴 DC 소재의 공사관 건물만 매입한 것은 고종대의 대미 외교 비중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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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년 8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의 특명전권공사 조민희가 대한제국 외부(外部)에 보고한 ‘주미공관수리후유물기’에는 새로 구입하거나 교체한 집기 목록을 자세히 적혀 있다. |
◆먼지 쌓인 잡지에서 찾아낸 초기 공사관 모습
2012년 10월 매입 당시, 공사관의 내·외부 모습은 도산 안창호 선생, 송재 서재필 선생의 유족들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사진들과 1903년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헌팅턴도서관(LA 인근) 소장의 내부 1층, 외부 경관 사진을 통해서만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헌팅턴도서관 소장 사진의 경우엔 프랜시스 벤저민 존스턴(Francis Benjamin Johnston)이라는 작가가 찍었고, 제목에 ‘Korean Legation’(한국 공사관)이라고 붙어있는 게 정보의 전부였다. 작가의 이력을 추적해보니 1890∼1893년 주로 워싱턴 DC에 소재한 외국 대사관과 공사관 내·외부 사진을 찍어 가정생활 잡지 ‘데모레스트 패밀리 매거진’(Demorest’s Family Magazine)에 투고했다는 기록을 찾았다. 이 기록이 맞다면 헌팅턴도서관에서 제공하는 ‘1903년 추정’ 정보는 오류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잡지를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고, 버지니아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2014년 7월 23일, 미국 출장 중 버지니아대 도서관에서 먼지를 수북이 덮어쓴 121년 전의 잡지를 확인했다. 1893년 7월호에 중국, 일본 공사관 다음 기사로 공사관 사진과 기사가 게재돼 있었다. 이로써 공사관 내부 전시공간 조성 시 원형 복원 시점을 1903년에서 1893년으로 10년을 앞당기는 근거 자료를 찾은 것이다. 잡지에 소개된 공사관 외부 사진은 ‘THE KOREAN LEGATION’(한국 공사관), 내부 사진은 ‘ENTRANCE AND DINING-ROOM, KOREAN LEGATION.’(한국 공사관 입구와 식당), ‘SALON, KOREAN LEGATION.’(한국 공사관 접견실), 인물 사진은 ‘MR. PAK CHUNG YANG. Korean Minister’(박정양, 한국 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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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에서 이채연이 서리공사로 재임시 출산한 자녀 이와선(Ye Washon) 묘비(1890년 10월12일∼12월17일). 미국 언론은 이와선을 미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조선인으로 보도했다. |
◆이역만리 타국에서 왕을 그리는 마음
헌팅턴도서관과 데모레스트 패밀리 매거진을 근거로 1893년 당시 1층 현관 입구, 식당과 접견실의 전시물품을 구입하고 제작하는 게 가능했으나 사진이 없는 1층과 2층의 4개 방을 전시하는 건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전시 스타일에 맞추는 것이 가능하긴 했지만 철저한 원형 복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을까.
서울대 규장각 소장자료 중에 1895년부터 을사늑약으로 외교기능이 정지된 1905년까지 주고받은 공문서 ‘주미내거안’(駐美來去案)의 원본이 있었다. 그 안에 1900년 4월 당시 임시 서리공사 이의담이 공사관 건물의 손상이 심해 물이 새는 등 수리·보수가 필요한 상황임을 대한제국 외부(外部)에 보고하면서 현지 보수 업체에게서 받은 견적서 ‘주미공관중수명세서’(駐美公館重修明細書)와 1901년 공사관 건물의 수리·보수 후, 새로 구입하거나 교체한 집기 목록을 자세하게 작성한 ‘주미공관수리후유물기’(駐美公館修理後留物記)가 있었다. 또 ‘명세서’(明細書)와 ‘유물기’(留物記)에는 공사관 각방 명칭과 물품목록이 상세하게 적시되어 있었다. 이에 따르면 1층은 메인홀, 응접실, 응접실 후면, 온실, 식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2층은 공사방·서재·사무실·침실, 3층은 공사 외 나머지 공관원들이 사용하는 3개의 방, 지하층은 보일러실·당구실·부엌·식료품저장고·세탁실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1층에 ‘정당’(正堂)이라는 공간을 두어 고종황제 어진(御眞)과 황태자 예진(睿眞), 그 외 태극기 1면(面)을 모셔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극복하기 위해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한 직후였다. 이는 1901년 당시 공사관에서 1층 정당에 어진과 예진을 모셔놓고 고종황제와 황태자에 대한 망궐례(望闕禮: 왕을 직접 배알하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예)를 거행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자료였다. 또한 공문서를 통해 당시까지 사진자료가 없던 공사관 2층과 3층의 층별 용도를 알 수 있었다. 2층은 사무소·서적실 등의 공적 업무 공간으로, 3층은 공관원 숙소 공간으로, 지하공간은 세탁실·식료품저장고·당구실 등 관리 및 휴식 공간이었다.
◆한 세기 만에 품은 공사관, 대화 이어가야
1888년 공사관 개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으로 폐쇄 될 때까지 공사 및 관원들의 현지 활동과 관련된 것은 주로 미국 내 신문과 잡지 등에서 확인이 가능했고, 대략 700여 건의 기사를 검토했다. 이 중 이채연이라는 인물과 관련된 기사들이 흥미롭다.
이채연은 1888년 박정양이 미국에 파견될 당시 번역관으로 수행했고, 같은 해에 서기관(書記官)으로 승진했다. 이해 7월에 이완용 참사관과 함께 병을 이유로 일시 귀국하게 되는데, 두 사람이 1889년 1월 부부 동반으로 워싱턴 DC로 복귀한 게 특이하다. 이와 관련해 조선 공사관 동정을 소개한 미국 신문은 “조선 여성들이 전통복식을 입고 최초 도미(渡美) 했다”는 기사를 작성했다. 이채연은 1890년부터 1893년까지 서리공사로 재임했는데, 부인 성주 배씨 사이에서 1890년 10월 12일에 아들(딸이라는 기사도 보임)을 출산했다고 현지 언론에서 기사화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아들을 출산했는데, 조선인 최초 미국 출생’이며, 이름은 ‘Washington’(워싱턴)의 음차로 ‘Ye Washon’(이와선)이라 지었다. 하지만 이와선은 천식으로 두 달 닷새 만에 사망해 당시 공사관의 건물 주인인 세스 펠프스(Seth Phelps)의 가족묘지에 안장됐다. 세스 펠프스의 사위 세블론 브라운(Sevellon Brown)은 당시 미 국무부 차관이자, 공사관 매입 시 계약 당사자였다. 그 가족묘지에 ‘조선의 첫 외교관 자녀’가 묻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내용은 공사관에 얽힌 많은 이야기 중의 일부다. 공사관을 되찾고, 그것을 온전히 되살려내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발굴한 사연들이기도 하다. 한 세기가 넘어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공사관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후손들이 이렇게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공사관을 지키고, 가꾸는 게 가능해진 이제,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한종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미국사무소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