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사회 되려면 증액심사도 소위서 논의해야” [차 한잔 나누며]

국회 속기사 36년 근무 정순화 의정기록심의관 / 기록 남는 소위서 결정돼야할 일 / 소소위서 ‘밀실심사’ 되면 안돼 / 기록은 역사… 미래 준비에 핵심적 / 일 늘면 힘들지만 투명화 뜻 깊어 / 불규칙·야근 잦은 속기사 업무 / 승진 제약 등 처우 개선 아쉬워 “속기하는 입장에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위에서 안 하면 좋지만 ‘국민의 알 권리’도 있고, 언론에서도 ‘쪽지예산’을 비판하잖아요. 투명사회가 되려면 소소위에서 (증액심사)하는 것보다는 소위에서 논의하는 게 맞다고 봐요.”

지난 14일 국회에서 만난 정순화(58) 국회의정기록심의관은 소소위 ‘밀실심사’에 대한 의견을 묻자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국회 속기사를 대표하는 ‘왕엄마’격인 정 심의관은 “기록은 역사다. 역사를 봐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 않은가”라며 기록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기록에 남는 소위에서 결정돼야 할 사안이 소소위로 넘어가는 ‘밀실심사’가 진행되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정순화 국회의정기록심의관이 지난 14일 국회 사무실에서 의정활동 기록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정 심의관은 1982년 국회에 속기사로 들어왔다. 11대 국회부터 시작해 어느덧 20대 국회 후반기를 맞고 있다. 선수로 치면 10선이다. 그가 입성했던 1980년대 초반은 군사정권 집권기로 엄혹한 시절이었다. 청와대 요원들이 본회의장에 파견 나와 청와대 관련 질의가 나오면 속기사들에게 실시간으로 보내라고 압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30여년의 세월을 거쳐 내년 여름 퇴직을 앞두고 있는 정 심의관은 지난 8월 국회 소속 129명의 속기사 중 가장 높은 직위(3급)에 올라 ‘왕엄마’ 역할을 맡고 있다. 국회 속기사는 국회 공식회의(본회의, 상임위 전체회의, 상임위 소위)를 모두 챙긴다. 2인1조일 때 본회의는 한 명당 10분, 상임위 전체회의는 25분, 상임위 소위는 20분씩 기록하고 교대한다. 1명이 들어갈 때는 본회의 5분, 상임위는 전체회의와 소위 모두 15분씩 기록한 뒤 교체한다. 소위에서 오간 내용은 2005년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다.

정 심의관은 “소위원회 속기를 안 할 때는 그 안에서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 몰랐다. 소위는 이 법이 어떤 취지에서 나온 것인지, 이 용어는 왜 법안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다룬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자 회의록이 없을 때는 국회도서관까지 와서 책자를 찾아서 발언을 살펴야 했는데 일은 늘었지만 정보 접근성이 좋아졌고 투명화한 것이 뜻깊다”고 강조했다.

속기사는 국회 공무원으로 신분이 보장된다. 하지만 그들의 근무 환경을 살펴보면 고개를 절레절레하게 된다. 국정감사나 예산안 심사가 진행될 때는 자정을 넘기는 일이 빈번해서다. 정 심의관은 “일·가정 양립하는 직원도 많은데 우리 일은 예측불가능한 것이 가장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는 “회의가 길어질 때는 사적인 일정을 잡기가 어렵다”며 “내년도 예산안 처리를 통과한 지난 7일에도 거의 24시간을 근무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 국감 때 지방노동청 감사를 속기하러 간 적이 있는데 의원들이 노동현장의 열악한 환경을 안타까워하며 밤을 지새웠다”고 떠올렸다. 이어 “그런데 우리도 지방 국감에 내려가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속기하기 일쑤였다”며 “어찌 보면 우리도 노동자 아닌가. 속으로 눈앞에 있는 속기사도 좀 생각해 줬으면 하고 원망했던 적도 많았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정 심의관은 속기사들의 처우개선이 아쉽다고 했다. 그는 “다른 행정직과 달리 속기사는 승진에 한계가 있다”며 “30년을 근무해도 6급까지만 달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공무원은 승진이 가장 좋은 동기부여인데 후배들에게 이 부분에 대해 제일 미안하다”고 털어놓았다.

속기사들에게 인기 있는 의원으로는 지금은 국토교통부 장관인 김현미 의원을 꼽았다. 정 심의관은 “김 장관은 예결위원장 시절 회의 진행을 정말 잘했다”며 “각 의원들에게 적절히 발언 기회를 주면서도 너무 늘어지지 않게 잘 끊어 후배들이 정말 좋아했다”고 귀띔했다.

속기를 잘하는 방법으로 그는 ‘신문 읽기’를 추천했다. 그는 “단어를 알아야 잘 받아칠 수 있어서 ‘잡학다식’해야 한다”며 “요즘엔 인터넷으로 보고 싶은 기사만 보려는데 종이신문과 책을 읽어 다양한 지식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속기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손으로 속기하던 시대를 지나 현재는 컴퓨터로 속기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인공지능(AI) 속기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정 심의관은 “AI 속기의 정확도가 80∼90% 정도 된다고 하지만 놓친 10∼20%에 중요한 단어가 들어 있으면 그 속기는 쓸모가 없어진다”며 “기술이 발전하고 있으니 사람을 대체할 수 있을지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최형창 기자 calli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