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9-01-26 12:58:04
기사수정 2019-01-26 12:58:04
과거사 이어 군사적 긴장 고조/한국, 후속조치 답보상태 ‘출구’ 안보여/ 일본정부 ICJ 제소 검토… 관계 급경색/ 한반도안보 한·미·일 공조도 균열 우려/“미래지향적 발전 위해 양국 소통 필요”
“더 나빠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있었다.”
정·관계와 학계를 막론하고 요즘 한·일관계 전문가들이 만나면 내뱉는 탄식이다. 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판결, 11월 화해·치유재단 해산 결정으로 양국 여론이 들끓은 뒤 최근 한 달 동안은 우리 함정의 레이더 조사(照射·비춤) 진실공방과 일본 초계기 저공비행 위협까지 이어졌다. 저마다 사상 최악의 한·일관계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사건들이었다. 두 나라는 풀리지 않는 과거사의 앙금 속에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동북아 안보환경에서는 북핵 위협에 공동 대응해야 하는 한·미·일 동맹의 일원이다. 경제적으로도 밀접하게 얽혀있다. 현재의 양국 관계를 우려하는 이들이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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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가 지난 4일 공개한 지난해 12월20일 조난 선박 구조작전 중인 광개토대왕함 상공에 저고도로 진입한 일본 초계기 모습. 국방부 유튜브 캡처 |
◆후속조치 급한데… 시간만 보내는 정부
정부의 당면 과제는 한·일관계 악화의 최정점에 있는 대법원 판결의 후속조치를 매듭짓는 일이다. 초계기 공방 등 후속 갈등은 결이 다른 문제이지만, 결국 앞서 빚어진 갈등이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징용피해자 측은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을 대상으로 한 강제집행 ‘데드라인’(마감시한)을 3월로 예고했으며, 현실화될 경우 일본의 맞대응이 예상된다. 당장 일본 당국과 정치권에선 여러 대응 시나리오가 흘러나온다. 우리 정부의 방향 설정이 시급하지만 진전된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대법원 판결 후속조치와 관련해 국무총리실이 주도해 대응방안을 찾겠다고 했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답보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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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해마루가 입주한 로비에서 열린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항소심 판결 기자간담회에서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 김세은 변호사,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임재성 변호사. |
일본은 ‘외교적 협의’를 요구하면서도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상태다. ICJ로 갈 경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신인도 하락 우려가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피해야 한다는 게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학연구소 교수는 25일 “(ICJ로 가면) 양쪽 모두 만족할 결론이 나올 수 없고, 한·일 모두에 상처만 남길 뿐”이라고 우려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우리보다 준비돼 있던 일본이 다툼을 대비해 치밀하게 준비해 왔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다만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교수는 “적어도 ICJ 절차가 진행되는 3년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다”며 “긍정적 측면도 없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교수 역시 “ICJ 절차는 차선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평화적 대안’은 가능할까
정부가 과거사와 우호·협력 관계를 분리하는 ‘투트랙 전략’을 말하고 있지만 징용 판결 문제를 일단락짓지 않으면 한·일관계는 쳇바퀴를 돌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피해자를 지원하는 민관 공동 참여 기금 마련이 대표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피해자 구제에 소홀하지 않으면서도 갈등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이전에도 몇 차례 시도된 적이 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주축이 돼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던 1990년대 아시아여성기금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시아여성기금은 사무국 운영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부 지원이 아닌 민간 성금으로 운영된 점이 한계로 지적됐다. 지난해 해산된 화해·치유재단도 설립 근거인 위안부 합의 과정의 부적절성을 극복하지 못했고 일본 정부에서 출자된 10억엔 반환 문제는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현재 일본에선 ‘화해·치유재단은 해산하고 징용 피해자 재단을 새로 설립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반발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대안적 접근에 당사자 간 공감대 형성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돼야 하는 이유다. 충분히 협의를 거친 뒤 신중하게 출자 대상을 정하고 공감대를 형성한 뒤 피해자의 충분한 이해를 받아야 지속가능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일례로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책임 있는 일본 기업과 일본의 청구권 자금으로 성장한 한국 기업(포스코 등), 청구권 협정 체결 당사자인 한국 정부 3자가 공동출자하는 기금’을 제시했다. 출자 대상과 관련해서는 ‘2+2(한국 정부·기업, 일본 정부·기업)’, ‘2+1(한국 정부·기업, 일본 기업)’, ‘1+1(한국, 일본 기업)’ 등 여러 안이 거론되고 있다.
◆“한·일관계 이대로 둘 수 없다”
현실적 어려움에도 한·일관계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문제의식은 확고하다. 외교가에서 ‘워싱턴 가는 길은 도쿄를 통해 가는 게 빠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일관계는 한·미관계의 숨은 고리 역할을 해왔다. 이뿐만 아니라 한·일관계는 한국이 동북아 정세의 고차방정식에 접근하는 핵심고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 교수는 “올 상반기 북핵 협상 등 중차대한 동북아 현안을 볼 때 한·일관계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고 말했다.
한·일 정상은 2008년 12월 이후 양자 방문조차 하지 않았다. 남 교수는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메시지가 양국 고위급에서 동시에 나올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홍주형 기자 jh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