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9-02-21 15:42:47
기사수정 2019-02-21 16:50:46
5·18민주화운동 폄훼 논란으로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약 20년 전 관련법 제정을 앞두고 엇갈렸던 여야 시각이 재조명되고 있다. 당시 여야가 민주화운동 법명에 ‘보상(補償)’과 ‘배상(賠償)’ 중 어떤 단어를 포함할 것인가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는데, 정확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책임 무게를 달리할 요소가 포함돼 지난 수십년간 같은 논란을 유발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5·18특별법)이 제정됐지만, 1년 가까이 지나도록 진상규명 위원회조차 꾸리지 못한 정치권을 향한 질타이기도 하다.
보상과 배상은 일견 별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그 의미를 들여다보면 큰 차이가 난다. 피해를 복구해준다는 데 공통점이 있지만, 가해자 측 행위가 적법하냐(보상) 위법하냐(배상)에 따라 뜻이 갈린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중요임무 종사죄’로 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2년여 수감하다 풀려났던 한상석 5·18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 고문(65)은 최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주최 ‘5·18 망언 처벌법 토론회’에 청중으로 나와 “(피해자들에게) 보상이 아닌 배상이 이뤄졌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의견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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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사진 전시회. 뉴시스 |
◆평민당의 ‘배상’ vs 민자당의 ‘보상’
5·18민주화운동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를 국가가 회복하고, 그들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으로 민주발전에 기여한다는 목적에서 정치권이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을 논의했던 1989~1990년 무렵부터 여야의 시각은 엇갈렸다.
당시 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평민당)은 민주화운동 교훈을 살린다는 취지를 내세우면서, 1990년 2월21일 ‘5·18 광주의거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배상에 관한 특별법안’을 확정해 소속의원 70명의 이름으로 발의했다. 5·18과 관련해 유죄판결 받은 사람의 특별재심청구권을 허용하고, 매년 5월18일을 공휴일로 정하며 대통령이 담화문에서 정부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한다는 게 골자로 법명에 ‘배상’이라는 단어를 넣었다.
그러나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민자당)은 피해 보상에 중점을 둔 법을 제정하려 한 것으로 전해진다. 법명을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로 만든 이유다. 당시 이를 다룬 한 언론 보도에는 “민자당은 과거 민정당(민주정의당)의 골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정신적 치유에 중점을 둔 평민당은 국가의 고의적 불법행위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사태가 발생했으므로 ‘배상’이라는 용어를 썼다”고 분석했다.
결국 법안은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1990년 국회를 통과했고, 5·18 관련 단체들은 ‘무효’ 주장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후 수차례 개정을 거쳐 현재의 법명으로 자리잡았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당시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민주화를 정착시킨다며 만든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은 6조(배상의제) 항목에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보상은 ‘배상’으로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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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호 5·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서울지부장이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구 자유한국당사 앞에서 열린 `5·18 망언 비호하는 자유한국당 해체 촛불문화제`에서 눈물을 닦고 있다. 뉴시스 |
◆법명 지적은 정치권 일갈이자 책임자 확인 촉구
법명 논란을 향한 일각의 지적은 5·18특별법 제정 1주년을 앞둔 상황에서 진상규명 위원회조차 꾸리지 못한 정치권을 향한 일갈로 보인다. 국가권력에 의한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따른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암매장 사건 조사로 왜곡·은폐된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국민통합에 기여한다는 목적의 특별법 취지를 정치권이 따라야 한다는 경고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단어 차이를 지적하는 논조는 책임의 주체가 누구인가로 연결될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