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9-02-26 21:17:18
기사수정 2019-02-26 23:21:57
잡지 기자·비평가로 사회생활 시작/ 70년대에 디자인·건축분야 뛰어들어 / 사람 형상화한 유명 와인따개 ‘안나G’ / 아물레또 스탠드·프루스트 의자 등
일상에 활기주는 디자인 남기고 떠나
‘21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여겨졌던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이자 건축가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지난 18일 고향 밀라노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하루 뒤 세상을 떠난 패션 거장 칼 라거펠트에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몰렸지만 멘디니는 한 시대를 풍미한 르네상스인이었다. 2차 대전 후 패전국으로서 피폐했던 이탈리아 산업을 디자인으로 부흥시킨 공로를 세웠다는 평가도 받는다.
애초 밀라노 공대에서 건축을 전공했던 멘디니의 사회 생활 출발은 언론·출판인이었다. 인테리어 잡지 ‘카사벨라’, 디자인 잡지 ‘도무스’ 등의 기자와 편집자, 비평가로 활동하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디자인과 건축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급진적 디자인 운동과 포스트모던 운동의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 멘디니는 네덜란드의 그로닝겐 박물관, 일본 히로시마 파라다이스 타워, 이탈리아 나폴리 지하철 역사건축 등 건축 분야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특히 아름다운 디자인의 많은 생활용품을 만든 디자이너로 기억된다. 지금도 2000원 남짓에 인터넷으로 살 수 있는 그의 디자인이 인쇄된 엽서 6매 세트부터 시작해 수많은 ‘디자인 바이 멘디니’ 생활용품이 국내에 시판 중이다.
◆안나G, 가장 아름다운 와인따개
멘디니가 디자인한 생활용품 중 가장 유명한 건 역시 1994년작 ‘안나G’다. 와인따개에 사람의 형상을 부여해 혁신적이면서도 인간적 감성이 살아 있는 디자인을 동시에 구현한 걸작. 디자인의 개념을 바꾼 명작이란 평가를 받는다.
애초 이탈리아 주방용품 브랜드 알레시의 홍보용 사은품으로 소량 제작됐으나 구입 문의가 쏟아지면서 대량생산돼 연간 1000만개 이상 팔려나갔다. 이후 ‘안나G 타이머’ 등 수많은 안나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다.
멘디니 전문가인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대표는 블로그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디자인을 그저 유머스러한 디자인, 편안한 디자인으로 알고 있고 그런 의미론적 가치가 이 디자인을 최고로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디자인은 그렇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색이나 형태가 고차원적으로 먼저 조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에 좋아 보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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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지구를 형상화한 LED스탠드 아물레또. |
◆해·달·지구, 아물레또
만년(晩年)의 멘디니가 만든 역작은 LED 스탠드 아물레또 시리즈다. 두 개의 원은 해와 달을, 이 원들을 밑에서 받들고 있는 것은 지구를 형상화했다. 원과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디자인이 돋보인다. 도넛 링처럼 중앙이 뻥 뚫린 헤드에 LED램프가 들어가 빛을 사방에서 비추기 때문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멘디니는 “특히 수술실 무영등으로부터 영감받은 원형 형태의 LED 발광부야말로 공부하는 학생, 디자인 및 정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눈보호를 위해서 가장 이상적인 디자인”이라고 자부했다. LED 자체도 눈 피로를 극소화하기 위해 특별하게 일본에서 만들어진 부품이라고 한다. 멘디니가 사랑하는 가족의 눈 건강을 기원하며 제품 생산을 총괄한 아물레또 시리즈는 특유의 장인 정신으로 가득찬 이탈리아 전문 브랜드와 협업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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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다빈치’로 불렸던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자신의 대표작인 프루스트에 앉아 있다. 고인을 기리며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 페이스북에 공개한 사진. |
◆멘디니 디자인의 순천 불사조
멘디니는 2015년 대규모 회고전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는 등 우리나라와도 각별한 인연을 만들었다. 백남준과도 함께 작품활동을 했다는 그는 국내 기업과도 숱한 협업을 했는데 지난해 11월에는 한꺼번에 세 건이나 이뤄졌다.
국민 청량음료인 롯데칠성 사이다 캔에 멘디니가 직접 디자인한 7개의 별 캐릭터가 그려진 한정판 ‘칠성사이다X멘디니’ 스페셜 에디션이 선보였으며 가구업체 일룸에선 멘디니와 협업으로 어린이용 탁상을 내놓았다. 또 LG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사 최고급 브랜드인 시그니처를 홍보하기 위해 멘디니와 공동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또 2016년에는 순천국가정원에 그가 디자인한 불멸의 새 불사조를 형상화한 탑이 세워졌다.
멘디니 일생의 대표작은 ‘프루스트’. 바로크 시대 의자에 폴 시냑의 그림과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에 영감을 받은 점을 찍어 완성했다.
고풍스럽지만 평범한 의자에 특유의 패턴을 더하는 것만으로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됐다는 평가를 받으며 멘디니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로 만들었다.
1978년 첫 작품이 나온 후 수많은 변주가 이뤄졌다. 개관 시 미술품 수집에 공들인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는 우리나라 전통의 조각보에서 영감을 받은 패턴으로 만든 높이 4.5m의 세계 최대 규모 버전의 프루스트가 전시돼 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