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자에게도 나만의 만족감이 큰 습관이 있다. 한 달에 두어 번 하는 집에서의 ‘혼술’이다. 그것을 즐기는 나름의 규칙도 있다. 야근을 마치고 늦게 퇴근한 날 밤을 택한다. 술맛의 극대화(?)를 위해 공복을 유지한다. 주종은 십수 년간의 기자 생활로 익숙한 ‘소맥’. 아내와 아이들을 억지로라도 재운 뒤 거실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며 1시간 정도를 마신다. 술기운에 알딸딸해질 즈음이면 맥락없는 자신감이 불쑥 솟기도 한다.
독자들은 어떠신가. 세상에 지친 중년들의 술타령이라 타박만 마시고 들여야 할 돈, 시간, 노력이 크지 않고 남들 눈에는 ‘저게 뭐냐’ 싶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느끼는 만족감이 큰 아이템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줄여서 ‘소확행’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다. 2018년 한국인의 화두 중 하나였고, 올해도 큰 관심사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사회현상이다. 내 것이 될지 알 수 없는 미래의 ‘큰 행복’이 아니라 둘러보면 매일이라도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가치 판단의 기준이 ‘우리’ 혹은 ‘타인과의 관계’보다 ‘나’로 변화한 상황의 반영으로 읽힌다.
◆“내 마음을 저격한” 확실한 행복 열풍
지난 한 해 한국인의 소확행에 대한 관심에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됐다.
성인 2917명을 대상으로 한 인크루트와 두잇서베이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8.8%가 소확행을 2018년의 유행어로 꼽았다. 소확행의 구체적인 형태는 말 그대로 소소하다. 닐슨코리아의 조사에 따르면 소확행을 언급한 게시글에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책(4167건)이었고, 여행(3224건), 영화(2722건), 커피(2331건), 꽃(1293건) 등이 뒤를 이었다.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직장, 번듯한 집과 자가용, 안정적인 결혼 등은 미래의 것으로 내 것이 될지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지금 참고 견디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반면 마음만 먹고 돌아보면 행복한 일은 매일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의 판단이다.
행복, 만족의 기준으로 ‘나’를 놓는 경향이 확산하면서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현상들이 주목을 끌고 있다. ‘퇴준생’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악의 취업난을 뚫고 어렵게 구한 직장이지만 자신이 정말 바라는 일을 하기 위해 구체적인 퇴사 준비에 몰두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퇴사학교’, ‘퇴사를 준비하는 나에게’ 등 참고할 만한 책도 많이 출판됐다.
성능, 가격 등을 고려해 남들과의 기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저격하는 진정성과 스토리”를 입힌 상품에 더 호응하는 경향도 뚜렷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해 12월 낸 보고서에서 “소확행, ‘가심비’(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 추구)와 같은 신조어에서 확인되듯 나만의 만족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확산하고 있다”며 “물건을 소유하기보다는 경험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행태도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제난, 사회 불신…소확행에 드리운 그림자
물론 개인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에 대한 관심은 이전에도 있었다. 2000년대 초에는 ‘웰빙’이 화제가 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힐링’이라는 단어로 대체됐다. 2년여 전에는 ‘욜로’라는 키워드가 대두되며 각광을 받았다. 각각이 그리는 행복의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여기엔 상대적인 풍요가 전제되어 있었다. 돈을 써서라도 삶의 질과 정신적 위로를 찾는 데 적극적이었고, 현재의 행복을 만끽하기 위한 과감한 소비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소확행은 악화된 경제사정과 희망이 옅어진 팍팍한 삶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실제 취업포털 커리어의 조사를 보면 75.1%는 소확행에 공감하며, 절반 이상(51.8%)은 소확행을 행복의 키워드로 선택했다. 그 이유로 ‘자주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의 만족감이 더 크다’(58.9%), ‘적은 돈으로도 행복할 수 있어서’(27.8%)를 꼽았다. 행복하지 않은 원인에 대한 질문에서는 ‘취업·진로 스트레스’(58.5%), ‘어려운 생활비 마련’(32.3%) 등의 응답 비율이 가장 높았다. 현실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으나, 그것을 감당하며 버틸 앞으로의 희망이 잘 보이질 않으니 무지개 너머의 파랑새를 꿈꾸기보다는 눈앞의 행복을 좇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며 나타난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절망감을 개인적 차원에서 해소하는 것이다. 희망제작소가 지난해 말 발표한 ‘2018년 시민희망지수’에서 사회적 차원의 희망지수는 49.6점으로 2017년보다 1.9점, 국가 차원의 희망지수는 52.7점으로 4.1점 하락했다. 반면 개인적 차원의 희망지수는 62.1점으로 다른 것에 비해 높을 뿐 아니라 유일하게 1.6점 상승했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는 “사회 시스템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구상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깨진 현실이 소확행으로 구체화한 측면이 있다”며 “국가, 사회, 지역 등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했던 ‘우리’라는 개념이 약해지고, 모든 것에 개인을 중심에 두는 인식이 강해진 것도 소확행이 사회적으로 회자되는 원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 삶의 방식 투영된 각국의 ‘소확행’
‘작은’, ‘사소한’, ‘보통’, ‘평범’ 등의 단어로 설명되는 소확행과 비슷한 맥락의 행복 담론은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런 현상들이 나타났고, 저마다의 언어로 설명한다.
프랑스에는 ‘오캄’이라는 말이 있다.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고요하게 삶을 즐기는 모습을 의미한다. 스웨덴의 ‘라곰’은 화려한 장식으로 집 안을 꾸미기보다는 창가에 작은 화초를 키우는 등의 방식으로 소박하게 공간을 채워나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휘게’는 따뜻한 장작불 옆에서 핫초콜릿을 마시는 기분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의미하는 덴마크어다. 모두 거창한 목표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찰나의 순간에 집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만에서는 한 매체가 ‘10대 소확행’을 선정해 발표하기도 했다. ‘푼돈 벌기’, ‘맛있는 음식 먹기’,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 ‘늦잠 자고 깨우는 사람 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친구로부터 안부를 묻는 연락’, ‘친구와의 여행’, ‘좋은 책, 음악 감상’, ‘오랜 친구와의 가벼운 술자리’, ‘가성비 좋은 물건 사기’, ‘샤워로 힘든 하루 마무리’가 그것이다.
일본에는 ‘이키가이’라는 말이 있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비결로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삶의 목표를 직업적 성공이나 높은 소득을 얻는 것에 두지 않고 일상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작은 이벤트를 가치있게 여기는 생활 태도로 해석된다. 켄 모기라는 뇌과학자는 자신의 책 ‘이키가이’에서 이를 “일본의 전통문화와 일본인의 삶 속에 깊이 스며 있는 개념”이라고 소개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따스한 햇살 바라보기,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커피 한 잔 마시기, 신선한 과일 챙겨먹기처럼 지극히 사소한 일들이 삶을 기쁘고 보람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