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맞는 일본 군국주의의 성지
알렉스 궉(郭紹傑·중국명 궈샤오제·56)이라는 이 남성은 홍콩계 중국 국적자였다. 난징대학살 81주년(2018년 12월 13일)을 하루 앞두고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항의하기 위해 기습 1인 시위를 벌였다. 야스쿠니신사가 한국인뿐 아니라 과거 일본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아시아, 세계인에게 침략과 박해의 상징임이 다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지난 15일 찾은 야스쿠니신사에서는 창립 150년을 기념하기 위해 새 단장을 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정문 격인 높이 25m의 제1도리이(鳥居·두 개의 기둥 사이로 가로대가 놓인 형태의 일본 신사 문)에서부터 본전 입구 격인 신문 앞까지 350m 거리의 참도(參道) 주변 곳곳에서 보도(步道) 개수를 하는 노동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신사 측에 따르면 참도 중앙에 있는 높이 12m의 ‘일본 육군의 아버지’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 동상 옆에 새롭게 중앙공원이 조성된다. 배전(拜殿), 본전, 영새부(靈璽簿·제사 대상자 명부)봉안전 보수와 야스쿠니회관 인테리어 공사도 진행된다.
이 신사는 메이지(明治) 일왕이 메이지유신 후 내전에서 숨진 관군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1869년 7월20일(구력·舊曆 6월12일) 건립을 결정한 도쿄초혼사(招魂社)가 출발이다. 10년 후인 1879년 7월4일 현재의 야스쿠니신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일본 신화의 신이나 일왕·왕가를 제사 지내는 신사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별격관폐사(別格官弊社)의 지위가 부여됐다. 당시 일반 신사가 내무성 관할이었던 것에 비해 육·해군성이 공동관리하는 군사시설의 성격이었다. 이런 지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야스쿠니(靖國)라는 두 자는 중국 고서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로써 국가를 편안하게 한다(吾以靖國也)”는 뜻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 뜻과는 달리 야스쿠니신사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 전쟁사에서 일본 내외를 전화(戰禍)의 참상에 빠트리는 데 일조했다. “(전략) 자네와 나는 동기(同期) 사쿠라. 따로따로 지더라도/ 화도(花都) 야스쿠니신사. 봄에 피어 다시 만나자.”(옛 일본군가 ‘동기 사쿠라’)라는 노랫말처럼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일본군의 정신적인 마약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야스쿠니 본질’, A급 전범 문제로 축소
제2차 세계대전 후 야스쿠니신사는 한때 위기에 직면했으나 국제정세 변화로 탈출구를 찾았다. 일본의 비군사화·민주화 촉진을 우선시했던 미국이 미·소 진영대립이 격화하자 일본의 공산화를 막고 일본을 미국의 동맹국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점령 정책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1947년 전몰자 유가족 모임인 일본유족후생연맹이 발족한 뒤 1953년 지금도 일본 정계와 보수층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유족회로 개칭되면서 야스쿠니신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정치·재정적 기반이 재형성됐다.
야스쿠니신사는 1946년 도쿄도(都)에 등록된 종교법인으로 전환했다. 일본 역대 총리나 장관 등 공직자가 공식 참배하거나 공금으로 공물(貢物)을 헌납할 경우 일본 내에서도 헌법상 정교(政敎)분리 원칙 위반 논란이 나오는 이유다. 야스쿠니신사는 한국 등 주변국과도 총리·장관의 참배 문제, 1978년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교수형된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A급 전범 14명 극비 합사(合祀), 한국인 2만1000명 무단 합사 문제 등 분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일본의 불철저한 과거사 청산은 물론 야스쿠니신사를 중심으로 한 침략전쟁 미화 등 일본의 퇴행에 대한 불신이 있다.
이날 찾은 야스쿠니신사의 각종 자료에서도 과거에 대한 반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조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헌화가 모집 팸플릿)라고 애국과 추도만을 강조하고 있다. 신사 내 전시관 성격의 유수관(遊就館)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는 표현이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군국주의, 황도(皇道)주의의 참혹한 결과를 외면한 채 한·일강제병합을 양국 간의 합법적인 조약 체결로 묘사하거나 중·일 전쟁의 책임을 중국 쪽에 떠넘기는 등 곳곳에서 교묘하게 역사 왜곡을 하는 행태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역사와 주변국에 대한 2차 가해인 셈이다.
군국주의의 정신적 지주인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최근 A급 전범 합사 문제로 극도로 축소된 측면이 있다. 한국이나 중국 정부도 일본 총리 등 고위 공직자가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할 경우에만 항의하는 수준이다. 일종의 정치적 양보를 한 것이다. 장차 A급 전범 합사 문제가 해결되면 이 신사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일본유족회장을 지낸 고가 마코토(古賀誠) 전 자민당 간사장은 A급 전범 폐사(廢祀)를 통해 일왕·총리가 참배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일단 신사 측 반발로 당장 실현되기는 쉽지 않지만 향후 “A급 전범만 사라지면 ‘야스쿠니 문제’는 해소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올 수 있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장은 “A급 전범 합사 문제는 야스쿠니신사가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시설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면서 “A급 전범 합사를 철회한다고 해도 야스쿠니신사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시설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고 지적했다.
◆ 제사 대상 99% 침략·무력개입 관련 한국인 2만1000여주 ‘영혼 감옥’에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가 제사 지내는 대상을 보면 근대 일본의 침략전쟁사와 이 신사의 성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2004년 10월17일 야스쿠니신사가 공표한 자료에 따르면 1869년 도쿄초혼사(招魂社) 건립 이래 신사의 제사 대상(신사 측 표현 제신수·祭神數)은 모두 246만6584주(柱)다. 이 중 내전 성격의 메이지(明治)유신(1868)과 세이난(西南)전쟁(1877)을 제외하면 절대다수인 99.4%(245만1862주)가 대외전쟁이나 무력개입과 관련된 것이다.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 전몰자(4850주)를 빼더라도 99.2%(244만7012주)가 명백한 침략전쟁·무력개입과 관련됐다. 여기에는 대만 출신 2만8000여주와 한국인(조선 출신) 2만1000여주도 포함돼 있다.
일제 강제점령의 희생자인 경우가 대다수인 한국인은 죽어서도 침략자가 만든 ‘영혼의 감옥’ 안에 갇힌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에 합사된 한국인은 415명으로 알려졌다. 패전 후 육·해군성 업무를 인수한 후생성(현 후생노동성)이 야스쿠니신사와 합사(合祀)를 공모해 1959∼75년 신사에 제공한 한국인 자료는 2만727명에 달한다.
도쿄=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