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한국영화사의 출발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됐지만 영화업계의 어려움은 전쟁 때와 다르지 않았다. 남한 영화계는 영화를 제작할 기자재와 시설이 턱없이 부족했거니와 정식 정부도, 교역을 위한 환율도 없는 상태에서 해외에서 필름을 수입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문제적 감독 최인규
이 영화의 최고 반전은 최인규 감독이다. 1911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최인규 감독은 형 최완규와 함께 고려영화사를 설립해 신의주에서 극장을 경영하며 영화 이력을 시작했다. 그의 감독 데뷔작은 ‘국경’(1939)이고 ‘수업료’(1940)와 ‘집 없는 천사’(1941)를 연출했다.
그 뒤 내선일체 논리를 바탕으로 한 ‘태양의 아이들’(1944)과 일본 ‘성전’ 참여를 독려하는 ‘사랑과 맹서’(1945)를 연출했다. 이 두 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업료’도 내선일체 이데올로기를 배면에 깔고 있다.
‘집 없는 천사’는 2000년대 중반 필름이 발굴되면서 마지막 시퀀스에 ‘황국신민의 서사’ 암송 장면이 포함된 사실이 발견됐다.
그런 최인규가 해방이 되자 재빨리 태도를 바꿔 ‘자유만세’ 외에도 1948년 ‘죄 없는 죄인’과 ‘독립전야’ 등 광복영화 3부작을 연출한 것이다. 최인규의 단짝인 ‘자유만세’ 촬영감독 한형모는 1944년과 1945년 두 편의 친일 영화에도 촬영감독으로 참여했다.
최인규와 한형모는 해방 후 한국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최인규 감독은 6·25전쟁 과정에서 실종됐는데, 그가 해방 후 6·25전쟁 전까지 자신의 산하에 거느렸던 감독이 정창화와 신상옥, 홍성기 등이다.
정창화 감독은 임권택과 정진우 감독의 스승이며, 임권택 감독은 다시 수많은 후배들을 길러냈다. 신상옥 감독의 계보 역시 임원식과 장일호, 이장호로, 다시 배창호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최인규는 한국 현대영화사의 출발점이자 꼭짓점의 위치를 점한다. 한형모 감독은 1956년 한국영화의 당대 흥행작이자 새로운 현대 한국영화의 흐름을 이끌었다고 평가되는 ‘자유부인’을 연출했고, 그 뒤에도 ‘여사장’(1959), ‘돼지꿈’(1961) 등 한국영화사의 걸출한 작품을 만들었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한형모는 1950년대 이후 현대 한국영화의 발명가 중 한 명이다.
◆망각의 역사와 기억의 역사
말하자면 광복을 기치로 내 건 한국영화사의 출발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미 친일의 역사에 침윤돼 있었다. 이 기묘한 불일치, 혼란, 착란은 한국 현대사가 갖고 있는 복잡성의 반영이기도 하다.
친일에서 항일로의 이 편리한 태세 전환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여기서 역사의 단죄를 논하거나 해방 후 한국영화사의 출발을 폄하하고 조롱하려는 의도는 없다. 조금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피식민과 해방, 격렬한 좌우 대립, 전쟁, 혁명, 쿠데타, 급격한 경제성장, 두 번째 쿠데타,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외환위기, 최근의 촛불혁명…. 그야말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는 단순히 국가를 뒤흔든 사건들이 지난 100여년간 이어졌다는 것, 사회·정치·경제적 변화가 심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격동은 우리 내부의 가치와 정서, 사고 체계를 흔들었다. 그리고 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가치와 내면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약함과 용기,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폭력과 선행이 뒤섞인 잡탕, 혼란의 기록들이 우리 역사의 원천을 이룬다. 그리고 이 혼란의 흔적들에서 무엇을 가리고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역사의 서사가 만들어진다.
어느 학자는 민족이 상상(력)의 산물이라 했다. 또 다른 학자는 민족은 망각 위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어떤 역사는 부끄럽고 비겁한 행적, 폭력과 학살의 경험을 끊임없이 지우고 덮어쓰고자 한다. 그리하여 무결하고 위대한 역사를 가공하고자 한다. 반면 이 지워진 흔적, 억압된 기억을 굳이 발굴해 우리 눈앞에 드러내는 역사도 있다. 이러한 공식역사와 대항역사(기억) 사이의 긴장 과정을 통해 과거에 대한 시각, 역사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혼란스럽지만 종합적인 역사가 만들어진다.
한국영화사 역시 이러한 가림과 폭로가 반복돼온 기록이다. 굳이 구분하자면 해방 후 현대 한국영화사의 출발점인 ‘자유만세’는 상상 혹은 망각의 시도다. 그리하여 존재 그 자체로 한국영화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 심지어 역사 자체의 어떤 본질을 슬쩍 드러낸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오늘날 역사가들에게 이 영화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망각하고자 시도했던 친일의 역사를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 나아가 해방 후 우리 한국영화사의 출발이 위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