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속 화약 5t 옮기고… 호스 하나로 밤새 마을 지키고…

대형 참사 막은 숨은 영웅들 / 25㎏ 장비 매고 1㎞ 걸어가 요양원 60명 구조 소방대원들 / 택시·배달 오토바이도 활약… 좁은 길 돌며 주민 대피 도와 / “마을 주민 모두가 일등공신”
한숨 돌린 소방관 지난 6일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에서 잔불을 제거 중이던 소방관이 헬멧을 벗고 쪼그려 앉아 지친 몸을 추스리고 있다. 속초=연합뉴스

늦은 시간 민가를 덮친 강원도 화재에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쓰고 이웃과 시민을 구하고자 불길 속을 뛰어든 ‘이타적 영웅’들의 활약이 한몫했다는 미담들이 쏟아지고 있다.

빨래 자원봉사 7일 강원도 속초시 장사동 장천마을에서 빨래 자원봉사자들이 산불로 피해를 본 주민들의 옷을 세탁하고 있다. 속초=연합뉴스
화마보다 강한 모정 7일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전남리에서 산불 피해로 집 등이 전소한 유여선(87·오른쪽)씨가 어머니 걱정에 달려온 아들에게 마당 텃밭에서 키우던 파를 뽑아 주고 있다. 강릉=연합뉴스

화마가 마을을 덮친 지난 4일 속초시에서 화물운송업체를 운영하는 이덕형씨는 화재 발생 문자를 받자마자 평소 화약을 여러 차례 실어 날랐던 민간 화약고로 단숨에 달려가 트럭에 화약을 싣기 시작했다. 화약고에는 발파용 화약 5t가량과 뇌관 3000여개가 보관돼 있었는데, 이씨의 가족과 경찰관 7명은 ‘일촉즉발’ 상황에서 이씨와 함께 화약을 트럭으로 전부 실어 날랐다. 화약을 모두 옮긴 뒤 불과 1시간도 안 돼 불길은 화약고를 덮쳤다.

택시기사와 배달대행 오토바이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강릉시 천남리에 거주하는 유여선(87) 할머니는 불이 난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 탈출에 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미처 대피하지 못한 어르신들을 대피시키고 있던 택시기사 A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배달 오토바이들도 화재 당시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하는 좁은 길 곳곳을 돌며 주민 대피를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속초시에 사는 차석동씨는 밤새 호스 하나를 들고 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며 지붕과 외벽에 물을 뿌려 불길이 번지는 걸 가까스로 막아냈다. 출동한 소방차들을 더 위급한 곳으로 가라고 돌려보내며 잔불 정리 작업까지 도맡았다. 또 속초시 김찬진씨는 이재민들에게 숙소를 무료로 개방해 피해 본 주민들이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구호물품 등을 전달했다.

목숨을 건 소방대원들의 활약도 피해를 줄이는 데 큰 몫을 했다. 속초 한 요양원에 어르신과 수녀, 요양보호사 60여 명이 고립됐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고성소방서 대원 9명은 불길과 연기에 차량이 진입하지 못하자 25㎏에 달하는 무거운 장비를 매고 1㎞를 걸어가 시민들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할머니가 있다는 제보를 전해 듣고 옥계면 남양3리에 도착한 장충열 강릉소방서 119 구조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마을 주민 전체가 서로를 구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며 긴박했던 상황을 묘사했다. 먼저 탈출한 주민들이 할머니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추리해 대원들에게 알려줬고, 대원들은 가스통까지 불이 근접해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유리창을 깬 뒤 불길과 연기 속에서 할머니를 무사히 구조했다. 장 대장은 “처음에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 주민들이 어디 어디에 사람이 있을 것 같다고 자기 일처럼 알려줬다”며 “소방대원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 전체가 구조의 일등공신이다”고 공을 돌렸다.

고성·속초 지역 화재 이틀째인 5일 강원 속초시 한 야산에서 군인들이 잔불 정리를 하고 있다.

군과 경찰의 적극적인 지원도 산불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일조했다. 군은 5일 오전 장병 약 1만명과 헬기 32대, 군 소방차 26대를 투입해 산불 잡기에 힘을 보탰다. 잔불 정리 등에 투입된 장병들에겐 마스크와 흰색 방탄헬멧 등 이전보다 진일보한 안전장비가 지급됐다.

 

김라윤 기자 ry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