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남북 정상의 회동을 반겼던 ‘판문점’으로 향하는 도로는 약 1년 만에 굳게 닫혀 있었다. 그곳에서 5㎞ 남짓 남서쪽에 위치한 경기 파주시 장단면 도라산전망대가 민간인에게 허용된 서부전선 최북단이다. 이곳에서는 북한 개성공단과, 판문점 남측지역인 ‘평화의집’과 ‘자유의집’이 육안으로도 보인다. 지난 15일 서울에서 차로 1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전망대에서 ‘평화의집’이 손에 닿을 듯 보였다. 평평한 지붕을 얹은 듯한 외관의 건물은 4·27 판문점 회담이 열린 역사적인 장소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 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아 역사의 땅 판문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합의한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이후 관광객의 안전 문제 등으로 7개월째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해가 바뀌었지만 아직 당시 약속한 ‘평화의 시대’는 열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남북과 유엔사령부가 관광객의 JSA 자유왕래를 위해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미 협상 진전 없는 남북관계는 ‘제자리’
인적 교류도 활발해졌다. ‘2019 통일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남북 간 왕래 인원은 7498명으로, 남북관계가 막혀 있던 전년의 115명에 비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체육교류, 산림협력 등 당국 간 교류협력이 진행되고, 체육·종교·학술 등 민간과 지자체 차원의 교류협력도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2007년 두 차례 열린 정상회담과 마찬가지로 비핵화 협상이 진전되지 못하면서 남북 관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기대와는 달리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북한이 대외전략에 대해 고심하면서 남북 대화의 동력도 힘을 잃었다. 북한은 지난달 22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일방 철수했다가 나흘 만에 일부 인원이 복귀했고, 남북고위급회담도 철도·도로 연결과 현대화를 위한 착공식 시기 등에 합의한 지난해 10월15일 회담 이후 5개월 넘도록 단 한 차례도 열리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선전 매체 등을 통해 대북제재 기조를 유지하면서 남북교류를 이어가겠다는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나섰다. 김 위원장도 지난 12일 열린 제14기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우리 정부를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촉진자 행세를 하지 말라”며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을 철저히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북·미 비핵화 협상 교착 상태가 장기화하면서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자 미국을 설득하라는 강한 압박에 나선 것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판문점 선언 이후 여러 가지 사업을 했지만 현재 남북 관계는 1년 전과 대동소이하다”며 “비핵화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는 남북 간의 사업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촉즉발의 대치국면 위기는 사라졌지만…
군사적 긴장을 낮추기 위한 판문점 선언 2조는 다른 조항에 비해 구체적인 성과를 일부 보여주고 있다. 적대적 행위를 중단하는 차원에서 남북은 서로 근접한 DMZ 내 감시초소(GP) 각각 11곳씩을 철거했다. GP는 비무장지대에 위치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중화기로 무장한 상태로 근무해 언제든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포병도 군사분계선(MDL)을 중심으로 각각 5㎞ 이내에서는 사격훈련을 중단했고, 해군은 완충 구역에서 함포 포신을 덮개로 덮고 해안포의 포문을 닫기로 했다. 공중에서는 공대지 유도무기 사격훈련도 중단했다. 이 영향으로 사격훈련으로 인해 자주 조업을 중단했던 연평도와 백령도 어민들의 불편이 많이 줄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또 세부 조항 가운데 확성기 방송과 전달살포 중단도 합의 이후 즉각 시행됐다. 지난해 3차례 군 장성급 군사회담과 한 차례 실무회담이 개최되기도 했다. 하지만 합의문에 담겼던 국방부 장관 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2조 합의 조항인 △상대방에 대한 모든 적대행위 전면 중지,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서해 평화수역 조성으로 우발적 충돌 방지 대책 마련, 안전어로 보장 △군사당국자회담 수시 개최 등은 크게 진척되지 않고 있다. 이들 조항 가운데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안전한 어로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논의가 가장 진전이 더디다.
문장렬 국방대 교수는 “군사 분야 합의서가 경제를 포함한 전반적 남북 관계에서 가장 구체적 성과를 냈다”며 “남북한이 평화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이행되지 않거나 미진한 부분으로는 서해 평화수역과 시범적 공동어로 구역의 조성 및 이용, 공동순찰 체계의 수립과 가동 등은 착수조차 못 하고 있다”며 “동서해 군 통신선은 유지되고 있으나 군사 당국자 사이의 직통전화는 설치하지 못했다”고 했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가 가동되지 못하면서 실무적인 협의를 진행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 비핵화 논의할 다자회담 진전 없어
1971년 남북적십자 회담 이후 2018년까지 남북이 채택한 합의서는 모두 262건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문화돼 현재도 효력을 발휘하는 문서는 극히 드물다. 항구적 평화체제를 담은 판문점 선언 3조는 공회전을 거듭하고 있다.
선언문 3조 3항에 담긴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다자회담 개최에 앞서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아직 3차 회담 일정도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 정상회담도 공식 제안된 상태지만 아직 북한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지난해 하기로 한 종전선언이나 불가침 합의 재확인이나 엄격한 준수도 아직 고위급 협의체가 제대로 가동되지 못해 공회전을 거듭하고 있다.
선언문 4항의 완전한 비핵화 목표 확인도 지난 하노이 회담 당시 북·미가 이견을 보인 뒤 협상이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2항의 상호 군사적 신뢰의 구축에 따른 단계적 군축 문제도 국방부 장관 회담이 열리지 못하면서 답보 상태다. 1항의 상호 불가침 합의는 그나마 최근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시험 등이 중단되면서 별다른 우발적 충돌사항 없이 상황이 관리되고 있다는 평가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판문점 선언 자체가 하나의 항목으로 끝나는 선언이 아니라 계속된 이행을 통해 채워나가는 것”이라며 “결국 근본적인 문제인 비핵화 협상이 진척되고, 북한에 대한 제재가 완화돼야 하지만 현재로써는 북한이 남북 관계를 개선할 계기를 찾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파주=조병욱 기자, 권이선 기자 brightw@segye.com